1.


"그래서 어쩔건데, 나를 베트남에라도 보낼건가 ?"


- "사고를 친"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에서 복무중인 육군 헬기 조종사들이 즐겨 하던 말

 

 

 

 

 

#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과 홍안의 묘한 대조 : 이들은 대개 지금이라면 아버지가 자동차 키를 넘겨 주기에도 불안해 할 19 ~21 살의 청년들


"high school 에서 flight school 로" 라는 구호를 모토로 신설된 육군의 헬기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에 의해
50만불 짜리 헬리콥터를 모는 항공 준위 (WO : WARRANT OFFICER) 로 키워진 한 무리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능력주의에 의해 조종사로서의 자질이 보이지 않으면 바로 짐을 싸고 소속 부대로 원대복귀 혹은 보병으로 베트남으로 파병되야 하는 무자비한 교육 시스템과 선배 기수와 실전을 경험한 비행 교관들의 무자비한 "갈굼"을 이겨내고 헬기 조종사가 된 청년들이었습니다.


"너는 베트콩이나 북 베트남군의 손에 전사할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어차피 너 같은 놈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니 놈 손에 (비행실력미숙으로 사고사) 죽고 말테니까"

 

- 미국 본토내의 육군항공학교의 고등훈련과정 교관이 교육생에게 한 말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항공흉장을 달지 못한 모든 다른 병과의 군인들을 우습게 보는 젊은이다운 오만함과 치기와 함께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적의 대공화기를 뚫고 마치 미친 것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 주곤하던 두 얼굴의 사나이들 (이라기 보다는 "소년"들)

 

하지만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듯" 이 아버지뻘의 고위 장교들이 보기에 이렇게 오만불손 (특히 너저분한 옷차림과 깔끔한 용모를 강조하는 직업장교단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저 놈의 콧수염 !) 하고 제 멋대로인 것 같은 무리들이 극도의 존경과 애정을 표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2.

 

 

 

 

베트콩과 북 베트남 정규군들에 의해 두려움과 경외심이 뒤섞인 "초록 얼굴"로 불리며 적의 본거지에 침투하여 소속 보병사단의 눈과 귀 역할을 담당했던 미 육군 LRRP (Long-range reconnaissance patrols 장거리 수색 정찰대) 대원들였습니다.

 

LRRP PILOT이 되려면 .......

 

"철저한 자발성" : 특별작전임무 (LRRP 혹은 MACV-SOG 파견 임무)를 하는 선배, 동료 조종사들의 추천 과 인정을 받을 정도의 조종 실력과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손사래를 치는 것이 마땅한 이런 위험천만한 임무에 자원할 만큼의 적당한 "멍청함"의 조합

 

 

 

 

LRRP들을 지원하는 17 항공중대 "KINGSMEN" (후에 101 항공대대에 편입됨으로써 부대명이 변경됨) 의 엠블럼과 MOTTO : OPERA NON VERBA [말보다 행동이다]

 

 

 

 

 


"헬기 부대원들이 웃음과 치기어린 장난으로 애써 외면하려 했던 두려운 현실"


헬기 부대원 (사수 GUNNER, 정비반장 겸 사수 CREW CHIEF 포함) 1 : 45 (45명당 1명꼴로 사망)

 

헬기 조종사 1 : 18

 

 

 

 

베트남전 종전시까지 희생된 헬기 조종사의 숫자 : 배출된 전체 조종사 4만명중 2,197명이 전사 및 실종

 

전쟁이 한창이던 68년에 베트남에 간 전체 286명이 졸업한 회전익 (ROTARY WING CLASSES) 67-5기의 경우 사망자의 비율은 1 : 13

 

부 록

 

헬기 부대원들의 일상을 음악과 함께 감상해 보시려면 : http://www.youtube.com/watch?v=-QNlebUDb8U

 

 

 


 

전쟁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하기를 꺼려하는 지저분 한 일이다, 대개 사회의 나이 많은 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을 아무런 책임도 없는 청년들이 뒷치닥 거리를 해야 하는 (청소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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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석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다 끌어 들여 !

 

미군정의 입장 :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격화되니 "PRO-JAP"을 했던 놈이면 "PRO-JOB" 성향이므로 우리에게도 충성할 거야 과거 일본군 놈들도 다 받아 들여 ! 지저분한 경력의 소유자 일수록 대환영 (알게 뭐야 뭐 우리 나라 군댄가 ? 미국판 흑묘백묘론 : 어떤 놈이든 빨갱이만 잘 잡으면 되지)

 

어지러운 당시 군내 세력분포 : 일본 육사출신, 만주 군관학교 (봉천, 신경) 출신, 학병출신, 일제 지원병, 하사관 출신, 극 소수의 광복군 출신자 들이 뒤섞인 잡탕 군대

 

2. 노추 이승만에 의한 군대 사병화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 경력에 빛나는 악질 민족반역자 김창룡의 특무대를 아시나요?

 

군대를 정치에 이용하겠다는데 귀관은 나의 명에 거역하는건가 ? 이종찬을 "포살"하라 !

 

3.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끊임없이 군사반란을 꿈꾸던 어떤 군인

 

대구 사범학교 학생 시절 쿠데타에 가담해 대륙낭인 신세가 된 교련 선생 (일본군 영관)에 의해 군사반란의 씨앗을 가슴에 품은 박정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3329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5732.html


"1936년 2.26사건이 그러한데, 그 사건은 존황파 우익 청년장교들이 고위관료들을 살해하는 등 돌출적 행동을 통해 군국주의 일본, 천황 중심의 일본을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런 풍조는 1932년 극우 청년장교들이 재벌 타도 등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5.15사건 때부터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인기가 있었다. 그것이 2.26사건으로 이어지고 그들이 주장한대로 실행에 옮겨지는데, 지금 일본이 그때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종찬, 이용문을 부추겨 쿠데타를 획책하다 결국 자신이 주역이 되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4. 정치에 관심이 너무 ~ 많았던 전 대위

 

공부는 못해도 언제 세상이 공부로 결판나는 것 봤나 ?

 

공부 못 한다고 무시하지마 나 두환이야 !

 

육사 생도를 군사 반란 (육사 생도들의 지지 퍼레이드) 에 동원시켜 반란 수괴 박정희의 눈에 쏙 든 전두환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기수 회장에 나서보려 했으나 공부도 못하는게 왜 나대냐는 동창생들의 눈흘김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초급장교시절의 전두환

 

(역설적이게도 육사 교수부에는 성적우수자들 주로 월남한 북한 출신들이 많았고 야전 부대에는 성적이 떨어지는 하나회 출신 영남출신들이 많았으니 그들은 물과 기름같은 사이)

 

5. 공부는 못해도 우리끼리 밀어주고 땡겨주자 :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결성

 

"배신하면 인격말살 운운 ~" 싹수가 노란 애들이 군내에 범죄조직을 하나 결성하고 박의 친위대를 자처한다

 

그걸 또 흐뭇하게 생각하고 정상적인 나라의 군대에서라면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될 군내 사조직을 방치하고 육성한 어

떤 독재자

 

6. 육본 인사과를 장악해서 군 조직의 요소요소에 우리 애들을 다 심어 놓고 경쟁자들 (비육사, 비하나회) 을 자빠 트리자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성적이 좋아도 아무 근거도 없는 "쟤 김대중 지지잔데요" 한 마디면 그 장교의 군 경력은 끝이 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절

 

7. 윤필용 사건과 박정희의 하나회 구명

 

원래 나쁜 짓을 많이 한 놈일 수록 다른 놈들이 나쁜 짓을 자신에게 하지는 않을지 의심이 많은 법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운운 ~)

 

2인자들이 친하게 지내는 꼴을 못 보는 박정희에게 날아든 제보

 

그에 이은 이후락 - 윤필용의 몰락

 

"가카가 노쇠하셔서 ~ 다음은 형님이" 발언 한방에 날아 간 당대의 세도가 윤필용과 보안사령관 강창성에 의해 전모가 드러난 하나회

 

하지만 하나회의 진짜 보스는 박정희였다는 사실

 

- "의리 운운"하는 하나회의 양아치같은 행태 : http://korean-houston.com/cafexe/15987

 

8. 10. 26과 12. 12

 

12. 12 군사반란의 진짜 이유 ?

 

그간 박정희 빽을 믿고 군대 내부에서 온갖 호가호위를 다해온 하나회 무리들이 정작 자신들의 빽 박이 죽자 얼마나 흥분, 당혹해 했을지는 안 봐도 블루레이

 

더군다나 10, 26이 나기 전 부터 정승화, 장태완 등 6. 25 참전 경력의 선배 장성들 (육사 및 갑종등 비육사) 이 군권을 장악하면 자신들은 10여년을 기다려야 된다는 데 항상 불만을 품었던 전두환 패거리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마니 ......

 

- 양아치 곤조 안하무인 김상구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628104701

 

9. 장군들의 밤

 

6.25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던 4성장군이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구타와 전기 고문을 당하고 공수인맥의 대부 정병주

장군은 부하의 총질에 관통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지니......

 

- 어느 군인의 명예로운 죽음 :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852

 

10. 1980. 5. 18 : 정치군인 박정희가 뿌린 씨앗이 악의 꽃을 피웠으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할 군이 총구를 국민에게 돌렸을 때

 

김재규 재판에서 나온 차지철의 부마항쟁시 발언과 박정희의 발언을 기억하시는지 ?

 

"캄보디아에서 처럼 수십만 죽는 것은 일도 아니야 ! 탱크로 깔아버려 운운"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 "누가 나를 사형시키 겠나 "

 

그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5. 18 광주의 비극은 1979년 부산 , 마산에서 벌어질 뻔한 참극이

 

시간 , 장소만 달리하여 그의 소위 "정치적 양아들"이 애지중지 키워온 박의 친위대에 의해 실행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

 

# 키워드, 주요 인물을 위주로 기술하였으니 위 사건들이 궁금하면 직접 관련 책, 자료를 검색하여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6.25 중에는 유명한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두만강까지를 누비며 수십번이나 사선을 넘었다. 그는 훈장없는 장교로 유명했다."훈장 증서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비에 젖었기에 모두 찢어버렸다"고 했다.

정승화씨는 자기 자랑에는 좀 서툰 인상을 준다. 기자가 일부러 자랑거리를 찾아 물어도 계면쩍어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명령없이 진지를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는 "전쟁을 해보면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용감하고 평소에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쁘더라"면서 "정치장교들이 전장에서 과연 소용이 있을까"라고 했다. 김창룡, 원용덕 등 이 나라의 유명한 정치장교들이 한결같이 전선을 피해 후방에서 권부의 주변만 맴돈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 전 육군참모총장 고 정승화 장군

추천도서

 

1. 군 (1~2권) / 김재홍 / 동아일보사

 

2. 인간 박정희 (1~3권) / 정영진 / 리브로

 

3.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 정승화 ,조갑제 / 까치

 

4. 유고 (1~2권) / 조갑제 / 한길사

 

5.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 조갑제 / 한길사

 

6. 박정희 살해 사건 비공개 진술 全 녹음 최초 정리 / 김재홍 / 동아일보사

 

7. 청와대 비서실 (1~3권) / 무려 "김진" (!? ^^) /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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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시병이 목격한 야마토의 함장 아루가 고사쿠의 마지막 모습

 

함교의 제일 위 대공 지휘소에서 헬멧과 방탄복을 입은 채로 그는 자신의 몸을 나침함(函) (binnacle)에 묶었다. 각종 비밀 문서와 암호 책자를 없애버리는 작업을 지휘한 후 그는 마지막으로 세 번 만세를 외쳤다.

 

함장은 자신과 같이 함정과 운명을 함께 하려고 하는 4명의 수병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어서 탈출을 하라고 그들을 밀어냈다.

 

마지막 수병이 그가 가지고 있던 비스킷 몇 조각을 함장에게 내밀자 함장은 싱긋 웃으며 비스킷을 받아 들었다.

 

하나 , 두 개째의 비스킷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던 찰나 그는 차오르는 해수에 삼켜지고 말았다.

 

1. 피로 물든 바다

 

함장의 이함 명령이 내려지고 야마토의 승무원들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이렇게 이함할 수 있었던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함의 내부에 있던 승무원들은 세차게 밀려들어 오는 해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익사하거나 함에 발생한 화재와 폭발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야마토의 부장 노무라 대령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바닷 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감에 따라 바다는 어둡고 끝 모를 깊이를 가진 청색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갑자기 바다속에서 빨간 섬광이 보였다.

 

훨씬 아래쪽에서 가라앉고 있던 야마토의 나머지 탄약고가 폭발한 것이다. 바닷물이 요란하게 흔들려 그에게 천지가 뒤집어 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으나 그것이 그와 여러 병사들의 목숨을 살렸다.

 

바닷물이 세차게 솟아 올랐기 때문에 노무라는 수면에 떠 올랐다.

 

8 척의 구축함 중 2척이 침몰했고 2 척은 엔진이 손상되어 항행불능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구축함 후유즈키에 있던 구축 함대 사령관은 바다에 흩어 져서 표류하는 생존자들을 구조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구축함들이 침몰한 야마토와 다른 구축함들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생존자들이 있는 수역에 들어섰다.

 

그들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언제 다시 미군 공격대가 급습할지 몰랐고 구출을 위해 속도를 줄이고 있는 구축함들은 미 잠수함대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될터였다.

 

시간이 부족했다 !

 

더구나 다가오는 구축함들이 어떤 생존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더욱 많은 생존자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기 위해 지나치는 구축함의 주변에 있던 자들은 함정의 프로펠러에 말려들어 사지가 토막이 났다. 한번 멀어진 구축함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소수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일일이 멈춰설 수 없었다.

 

자신을 지나쳐 버린 구축함들을 생존자들은 절망적인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는 없었다.

 

 

 

 

"바다에서 구조된 승무원들로 구명보트는 곧 초만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조를 바라고 보트 주변으로 헤엄쳐오는 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가능한 많은 수를 구조하고 싶었지만 구명보트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들이 뱃전을 붙들고 배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거세었고 보트는 점점 기울어 졌다.

 

바로 이 순간에 구명보트의 정장과 부사관들이 그들이 들고 있던 일본도를 빼들었고 뱃전을 잡고 있던 손들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올라타려는 자들을 발로 걷어 차서 바다에 빠뜨려 버렸다."


- 구축함 하츠시모호에 의해 구조된 어느 장교의 회고

 

배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우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그들은 칼을 휘두르던 그들을 바라보던 그 절망적인 눈과 얼굴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전우에 의해 손목이 잘려진 채 바다속으로 사라져 가야했던 그 얼굴들을.

 

"나는 의무실에 도착했다. 부상병들의 피를 뒤집어 쓴채 2명의 군의관이 결연한 표정으로 수술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박의 목욕탕을 응급 의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술시에 나오는 피를 배수구로 흘려보낼수 있었다. 배수구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피에 잠겨버렸으리라.

 

의무실의 한쪽에는 시신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내 바로 앞의 환자는 기관포탄에 의해 발목이 잘려버린 어린 수병이었다.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이었는데 그들은 마취제가 없었다.

 

수병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 앞에서 수술용 칼 (SCALPEL) 이 다리를 절단했다. 순간 그의 비명이 그쳐버렸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을까 ? 하지만 두 군의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병의 머리와 다리를 잡아서 몇 번 흔든 뒤 그 수병의 시체를 옆의 시체 더미로 던져버렸다."

 

- 요시다 미츠루 소위의 회고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던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이렇게 괴멸했다.

그들이 세계에 자랑하던 일본 무사도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살아남으려는 본능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2. 귀 항

 

야마토의 침몰 2 시간후 연합 함대 사령부로 부터 긴급 명령이 내려왔다.

 

"공격을 취소한다. 생존자들을 구조하여 사세보 항으로 향하라"

 

항행 불능이 된 구축함 2척 (가스미 와 이소가제호)은 승무원들을 옮겨 태운뒤 동료함에 의해 자침되었다.

 

작전에 투입된 10 척중 6척이 침몰했다. 남은 4척의 구축함들은 서둘러 사세보항으로 향했다.

 

1945년 4월 8일

 

부상자들을 사세보 항내의 격리된 섬에서 치료하도록 내려놓고 나머지 생존자들 (경상자 포함)은 구레(kure) 항 으로 향했다.

 

구레 해군 기지에서 승무원은 그들 앞으로 온 산더미 같은 편지들을 발견했다.

 

모두 승무원들의 가족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편지의 대부분은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

 

수신인이 사망한 편지를 찾아내 분류하여 발신인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해야하는 승무원들의 마음은 쓰라렸다.

 

도착한 구레항에서 침몰한 함정의 승무원들은 새로운 배치를 기다렸다.

 

야마토의 부장 노무라 대령은 야마토의 승무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 남았다. 우리는 죽기에 더 나은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의가 없다면 우리 승무원들 모두 특공 임무에 자원한다 !"

 

야마토 출격의 배경이 되었던 텐고 작전이 끝이 난 후 연합함대 참모장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해군 전 부대에 하달했다.

 

"1945년 초반 우리의 해군특공부대들은 오키나와 해역의 적 침공부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우리 제국해군과 수상함대의 영광을 한층 드높였다. 용감한 장병들과 제 2 기동부대의 사령관 ( 이토 세이이치 중장) 이 황국을 방어하는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황국을 지키려는 충성스런 마음은 우리를 감격시켰으며 그들의 충정은 수대에 걸쳐 빛날것이다.

 

이에 본인은 그들의 고귀한 행동을 전 해군에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바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자들에게 이런 무의미한 말 한마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

 

# 미 58 기동부대 VS 일본 제 2 기동부대

 

일본 해군 피해상황 : 전함 1, 순양함 1, 구축함 4척 침몰

 

사망자 : 약 4,000명 (야마토 호의 승무원 2,747명)

 

[she took 2,747 men with her, all but 269 of her crew. Surrounding Japanese ships lost an additional 1,167 men.]

 

미 해군 피해상황 : 전투기 3, 폭격기 4, 뇌격기 3

 

사망자 : 12명

 

에 필 로 그

 

 

 

 

[1]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

 

히요시의 지하 벙커에서 수많은 부하 장병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도요다 소에무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최고전쟁회의의 요인으로서 그는 2차례의 원폭투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느 전쟁에나 비참하게 죽어가는 자와 안전하게 살아남는 자는 따로 있는 듯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도 12년이나 더 살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2] 1985년 수중 탐사에 의해 야마토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야마토의 함수에 붙어있던 일본 황실의 상징 : 마치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 저 헛된 상징을 위해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

 

 

 

 

[3] 야마토의 생존자 요시다 미츠루 소위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야마토의 함교에서 작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목격했던 그는 1950년대 "전함 야마토의 최후"라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일본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 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난뒤 일본 은행 (bank of japan) 에서 근무 하면서 글과 강연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며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하다 1979년에 사망했다.

 

 

 

 

[4] 야마토의 출격 명령이 떨어지고 예정된 자살과도 같은 이번 임무의 성격을 알게 된 초급 장교들은 병약해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수병, 부양 가족이 많은 3, 40대의 노병들을 각 부서에서 조사해서 그들을 이번 임무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을 함의 지휘부에 제출했다.

 

그들의 의견은 받아 들여져서 출항 직전에 그들은 함을 떠날 수 있었다.

 

결국 힘없는 많은 수병들의 목숨을 헛된 죽음으로 부터 구한 것은 천황도 해군 군령부도 야마토가 자랑하던 거대한 포탄도 아닌 "인간에 대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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