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지막 연회

 

 

 

 

 

야마토의 지휘부 : 전쟁 초기와 말기의 사진.

 

야마토는 한때 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으로 최고의 대우 (심지어 급식에서도 !! 다른 해군 장병들과는 달리 전쟁 말기까지 "쌀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를 받았고 이는 승무뭔 선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야마토에 탑승 하고 싶어 했고 승무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군국주의 일본군의 상징이자 일본군 장교들의 호사 취미중 하나 였던 명검 수집. 현대의 샐러리 맨들이 고급 차를 사려고 무리를 하듯이 그 시절에는 이름있는 장인들의 일본도를 사기 위해 빚을 지기도 했다는 군요)

이 사진속의 일본도를 주목해 주세요. 소위 "일본 무사도"를 상징한다는 일본도가 후에 어떻게 사용 되는지는 5 ~ 6 편에서)

 

1945년 4월 5일 17시 30분. 작전 개시 전야의 야마토 함상

 

모든 승무원에게 사케 (sake) 가 배급 되고 마지막 연회가 시작되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이었기에 그 순간이 더 소중했는지 모른다. 평소의 엄격한 규율은 느슨해졌고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웃음이 피어 올랐다.

 

승무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두고 온 고향의 노래를 불렀고 계속 술을 마셔 댔다. 엄연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더 크게 웃고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사관실 (WARDROOM) 에서는 야마토의 초급 장교들이 모여있었다.

 

건배를 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리던 도중 보조 항해사 (ASSISTANT NAVIGATOR) 스즈키 소위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일순간 사관실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누구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사관실의 모든 사람들이 스즈키 소위를 노려보고 있을 뿐.....

 

애써 감추고 했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다시 그들을 휘감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고 그것은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함장과 부장이 양손에 사케를 들고 사관실을 찾아왔다.

 

50여명에 달하는 초급장교들은 함장과 부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취중에 함장의 대머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 부장의 옷을 잡아 당겨 찢어 버리기도 했다. 평소였더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 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모든 것이 허용되는 밤이었다.

 

2. 어머니의 편지

 

통신장교 나카다니 소위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룸메이트인 요시다 소위 (레이다 장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나카다니 소위는 요시다 소위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카다니 소위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NISEI) 였다. (즉 그는 일본계 미국인인 미국 국적자이던 것이지요.)

 

게이오 대학에 유학 도중에 해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그의 두 동생들은 유럽 전선에서 미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청년으로서 오직 그만이 미군의 긴급송신문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니세이라는 이유로 그의 몇몇 상급자들은 많은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모욕하고는 했다.

 

그럴때면 그는 갑판에 홀로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정성스런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있다.

 

부디 네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오랫동안 기다려온 어머니의 편지였다.

 

그 동안 여러 동료들이 친구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누릴동안 오직 그만이 그런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출격 전야에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참고 : 이 편지는 연합국과 일본의 유일한 교섭로 였던 중립국 스위스를 거쳐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수 많은 괴롭힘에도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나카다니소위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요시다소위는 말없이 편지를 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참고 : 2차세계대전중 (일본에 의한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에서는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강제 소개명령이 내려져서 대부분 서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량한 중서부 오지에 위치한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아마 나카다니 소위의 어머니도 이런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23 : 00

 

함내의 통신시설 (PA)을 통해서 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군들 오늘 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우리의 임무로 돌아간다.

 

최선을 다해 주기바란다. 이상."

 

예전처럼 엄격한 말투였지만 왠지 부장의 음성은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애정어린 목소리 였다고 요시다 미츠루 소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제 축제는 끝이 났고 마지막 결전만이 야마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일본 해군 주요인물


연합 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

 

제 2 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 중장

 

제 2 수뢰 전대 사령관 고무라 게이조 소장

 

야마토 함장 아리가 고사쿠 대령

 

야하기 함장 하라 다메이치 대령

 

야마토 부장 노무라 지로 대령


 

 

 

P.S. 이 글에서 승무원들에 관한 내용은 실제 야마토의 승무원이자 생존자였던 요시다 미츠루 (YOSHIDA MITSURU) 의 "REQUIEM FOR BATTLESHIP YAMATO" (번역 : RICHARD H.MINEAR) NAVAL INSTITUTE PRESS를 참고했습니다.


보 론


(1)

 

1943년 전황이 악화 되자 일본은 문과 대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를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강제 징집에 나서게 되는 데요.

 

이때 평소 엘리트 주의를 표방하며 육군과 사사건건 대립해오던 해군과 육군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악명을 익히 알고 있던 많은 대학생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심지어 해군에의 입대를 "국내 망명"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일본 유수 대학의 많은 대학생들이 해군에 장교로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 (T T) 이들도 결국 지옥을 경험하게 되지요]

 

제가 참조한 위 도서의 저자 요시다 미츠루씨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었던 학도병 출신이었습니다

 

많은 사관들은 마치 악마처럼 난폭하게 행동했다. 직업 군인들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학도병의 사소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 할 때 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대 전원에게도 가혹한 체벌을 가했다.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학도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생지옥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문을 들어선 후 얼굴 모양이 바뀔 정도로 구타를 당하는 “맹훈련”의 날이 계속 되었다. 1945년 1월 2일 아침은 카네코라는 소위에게 20번이나 얼굴을 맞아 입안이 갈기갈기 찢어져 고대하고 있던 새해의 떡국을 먹지 못하고 피를 삼키며 지냈다. 2월 14일은 같은 부대의 거의 전원이 외출했을 때 농가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밤에 7시간이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몽둥이로 개, 돼지처럼 엉덩이를 맞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리고 한 사람씩 사관실에 불려 들어 갔는데 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사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타 당했다. 얼굴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다시 일어서면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맞아 나가 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마루 끝에 부딪혀 중태에 빠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이러한 야만스러운 짓을 한 사람은 분대장 츠츠이라는 중위로 우리들은 아직도 이 남자를 찾고 있다.

 

직업 군인들은 종종 말단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현재의 지위에까지 오른 자들로 학도병들은 이들 직업군인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는 자신과 비교하여 학생들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특권계급 출신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2)

 

아래의 문장은 카스가 타케오 씨의 1995년 6월 21일자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카스가 씨가 이 편지를 쓴 것은 85세 때의 일이다. 해군에 소집되어 츠치우라 해군 기지에서 학도병을 위해 식사, 세탁, 방 청소 그 밖의 시중을 맡은 그는 출격전야의 대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러기 룸에 송별의 주연석을 준비함. 내일 출격하는 젊은 사관들의 술자리는 데우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거나 벌컥벌컥 마시기 ! 결국에는 모든 것이 수라장으로 변하여 어두운 막장 아래의 전등을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양손에 치켜든 의자로 창유리를 와장창 차례로 부수며, 새하얀 테이블 보도 찟겨져 나간다. 군가는 욕하는 소리처럼 서로 뒤 섞이고 등화관제가 실시되는 군대에서 여기 기러기 룸의 술자리는 별세계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오늘밤만의 목숨. 부모, 형제, 자매의 얼굴 모습,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같이 돌고 도는 상념은 끝이 없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 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서라고, 젊은 고귀한 청춘의 목숨을 바칠 각오는 다짐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팔짱을 끼고 명상하는 사람, 엉망이 된 송별회장을 떠나는 사람, 몇 시간이나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 처참한 출격 전야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학도병사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른 아침 비행장으로 달려가 지난밤에 물이 아닌 찬술을 나누어 마신 용사는 히노마루의 머리띠를 매고 용감하게 높은 폭음을 내며 출격 ! 나는 영령이 되신 분들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훈련 뒤에 매일같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기합이 계속되었다.”

 

카스가 타케오는 매일 같이 당한 구타의 후유증으로 현재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관들은 “군인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체벌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편지는 지원자들이 죽음 전야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 오오누키 에미코 저 / 모멘토 에서 인용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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