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시병이 목격한 야마토의 함장 아루가 고사쿠의 마지막 모습

 

함교의 제일 위 대공 지휘소에서 헬멧과 방탄복을 입은 채로 그는 자신의 몸을 나침함(函) (binnacle)에 묶었다. 각종 비밀 문서와 암호 책자를 없애버리는 작업을 지휘한 후 그는 마지막으로 세 번 만세를 외쳤다.

 

함장은 자신과 같이 함정과 운명을 함께 하려고 하는 4명의 수병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어서 탈출을 하라고 그들을 밀어냈다.

 

마지막 수병이 그가 가지고 있던 비스킷 몇 조각을 함장에게 내밀자 함장은 싱긋 웃으며 비스킷을 받아 들었다.

 

하나 , 두 개째의 비스킷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던 찰나 그는 차오르는 해수에 삼켜지고 말았다.

 

1. 피로 물든 바다

 

함장의 이함 명령이 내려지고 야마토의 승무원들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이렇게 이함할 수 있었던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함의 내부에 있던 승무원들은 세차게 밀려들어 오는 해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익사하거나 함에 발생한 화재와 폭발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야마토의 부장 노무라 대령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바닷 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감에 따라 바다는 어둡고 끝 모를 깊이를 가진 청색으로 바뀌어 갔다.

 

그때 갑자기 바다속에서 빨간 섬광이 보였다.

 

훨씬 아래쪽에서 가라앉고 있던 야마토의 나머지 탄약고가 폭발한 것이다. 바닷물이 요란하게 흔들려 그에게 천지가 뒤집어 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으나 그것이 그와 여러 병사들의 목숨을 살렸다.

 

바닷물이 세차게 솟아 올랐기 때문에 노무라는 수면에 떠 올랐다.

 

8 척의 구축함 중 2척이 침몰했고 2 척은 엔진이 손상되어 항행불능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구축함 후유즈키에 있던 구축 함대 사령관은 바다에 흩어 져서 표류하는 생존자들을 구조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구축함들이 침몰한 야마토와 다른 구축함들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생존자들이 있는 수역에 들어섰다.

 

그들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언제 다시 미군 공격대가 급습할지 몰랐고 구출을 위해 속도를 줄이고 있는 구축함들은 미 잠수함대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될터였다.

 

시간이 부족했다 !

 

더구나 다가오는 구축함들이 어떤 생존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더욱 많은 생존자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기 위해 지나치는 구축함의 주변에 있던 자들은 함정의 프로펠러에 말려들어 사지가 토막이 났다. 한번 멀어진 구축함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소수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일일이 멈춰설 수 없었다.

 

자신을 지나쳐 버린 구축함들을 생존자들은 절망적인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는 없었다.

 

 

 

 

"바다에서 구조된 승무원들로 구명보트는 곧 초만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조를 바라고 보트 주변으로 헤엄쳐오는 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가능한 많은 수를 구조하고 싶었지만 구명보트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자들이 뱃전을 붙들고 배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거세었고 보트는 점점 기울어 졌다.

 

바로 이 순간에 구명보트의 정장과 부사관들이 그들이 들고 있던 일본도를 빼들었고 뱃전을 잡고 있던 손들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올라타려는 자들을 발로 걷어 차서 바다에 빠뜨려 버렸다."


- 구축함 하츠시모호에 의해 구조된 어느 장교의 회고

 

배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우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그들은 칼을 휘두르던 그들을 바라보던 그 절망적인 눈과 얼굴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전우에 의해 손목이 잘려진 채 바다속으로 사라져 가야했던 그 얼굴들을.

 

"나는 의무실에 도착했다. 부상병들의 피를 뒤집어 쓴채 2명의 군의관이 결연한 표정으로 수술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박의 목욕탕을 응급 의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술시에 나오는 피를 배수구로 흘려보낼수 있었다. 배수구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피에 잠겨버렸으리라.

 

의무실의 한쪽에는 시신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내 바로 앞의 환자는 기관포탄에 의해 발목이 잘려버린 어린 수병이었다.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이었는데 그들은 마취제가 없었다.

 

수병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 앞에서 수술용 칼 (SCALPEL) 이 다리를 절단했다. 순간 그의 비명이 그쳐버렸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을까 ? 하지만 두 군의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병의 머리와 다리를 잡아서 몇 번 흔든 뒤 그 수병의 시체를 옆의 시체 더미로 던져버렸다."

 

- 요시다 미츠루 소위의 회고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던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이렇게 괴멸했다.

그들이 세계에 자랑하던 일본 무사도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살아남으려는 본능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2. 귀 항

 

야마토의 침몰 2 시간후 연합 함대 사령부로 부터 긴급 명령이 내려왔다.

 

"공격을 취소한다. 생존자들을 구조하여 사세보 항으로 향하라"

 

항행 불능이 된 구축함 2척 (가스미 와 이소가제호)은 승무원들을 옮겨 태운뒤 동료함에 의해 자침되었다.

 

작전에 투입된 10 척중 6척이 침몰했다. 남은 4척의 구축함들은 서둘러 사세보항으로 향했다.

 

1945년 4월 8일

 

부상자들을 사세보 항내의 격리된 섬에서 치료하도록 내려놓고 나머지 생존자들 (경상자 포함)은 구레(kure) 항 으로 향했다.

 

구레 해군 기지에서 승무원은 그들 앞으로 온 산더미 같은 편지들을 발견했다.

 

모두 승무원들의 가족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편지의 대부분은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

 

수신인이 사망한 편지를 찾아내 분류하여 발신인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해야하는 승무원들의 마음은 쓰라렸다.

 

도착한 구레항에서 침몰한 함정의 승무원들은 새로운 배치를 기다렸다.

 

야마토의 부장 노무라 대령은 야마토의 승무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 남았다. 우리는 죽기에 더 나은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의가 없다면 우리 승무원들 모두 특공 임무에 자원한다 !"

 

야마토 출격의 배경이 되었던 텐고 작전이 끝이 난 후 연합함대 참모장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해군 전 부대에 하달했다.

 

"1945년 초반 우리의 해군특공부대들은 오키나와 해역의 적 침공부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우리 제국해군과 수상함대의 영광을 한층 드높였다. 용감한 장병들과 제 2 기동부대의 사령관 ( 이토 세이이치 중장) 이 황국을 방어하는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황국을 지키려는 충성스런 마음은 우리를 감격시켰으며 그들의 충정은 수대에 걸쳐 빛날것이다.

 

이에 본인은 그들의 고귀한 행동을 전 해군에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바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자들에게 이런 무의미한 말 한마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

 

# 미 58 기동부대 VS 일본 제 2 기동부대

 

일본 해군 피해상황 : 전함 1, 순양함 1, 구축함 4척 침몰

 

사망자 : 약 4,000명 (야마토 호의 승무원 2,747명)

 

[she took 2,747 men with her, all but 269 of her crew. Surrounding Japanese ships lost an additional 1,167 men.]

 

미 해군 피해상황 : 전투기 3, 폭격기 4, 뇌격기 3

 

사망자 : 12명

 

에 필 로 그

 

 

 

 

[1]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

 

히요시의 지하 벙커에서 수많은 부하 장병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도요다 소에무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최고전쟁회의의 요인으로서 그는 2차례의 원폭투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느 전쟁에나 비참하게 죽어가는 자와 안전하게 살아남는 자는 따로 있는 듯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도 12년이나 더 살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2] 1985년 수중 탐사에 의해 야마토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야마토의 함수에 붙어있던 일본 황실의 상징 : 마치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 저 헛된 상징을 위해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

 

 

 

 

[3] 야마토의 생존자 요시다 미츠루 소위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야마토의 함교에서 작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목격했던 그는 1950년대 "전함 야마토의 최후"라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일본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 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난뒤 일본 은행 (bank of japan) 에서 근무 하면서 글과 강연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며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하다 1979년에 사망했다.

 

 

 

 

[4] 야마토의 출격 명령이 떨어지고 예정된 자살과도 같은 이번 임무의 성격을 알게 된 초급 장교들은 병약해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수병, 부양 가족이 많은 3, 40대의 노병들을 각 부서에서 조사해서 그들을 이번 임무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을 함의 지휘부에 제출했다.

 

그들의 의견은 받아 들여져서 출항 직전에 그들은 함을 떠날 수 있었다.

 

결국 힘없는 많은 수병들의 목숨을 헛된 죽음으로 부터 구한 것은 천황도 해군 군령부도 야마토가 자랑하던 거대한 포탄도 아닌 "인간에 대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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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마토 최후의 날

 

 

 

 

야마토 격침의 주역 미 해군 비행사들

 

2차대전 당시의 항공병들의 평균적인 연령은 19~21세 였다고 합니다. 모두 지원병들 이었던 그들은 입대 전에 학생, 농장의 농부, 교사, 외판원, 공장 노동자로 군대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사람들이 많았고 자동차도 몰아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 훈련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선배 교관들의 노하우를 전수받게 됨으로써 태평양의 하늘을 제압하고 대일전 승리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지요.

 

이토 중장의 불안은 몇 분 후 제 2진의 미군 공격대가 내습함으로써 현실화 되었다.

 

13시 37분과 13시 44분에 일군의 Avenger 뇌격기 이 5발의 어뢰를 야마토에 발사했다.

 

모두가 좌현에 명중했다. 갈갈이 찢긴 여러 곳의 틈 사이로 바닷물이 흘러들어 야마토는 좌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함교에 있던 장교들도 이제는 함의 자세를 바로 잡고 침몰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함장인 아루가 고사쿠 대령은 주저하지 않고 우현 쪽의 기관실과 보일러실에 물을 채우도록 명령했다.

 

(일본 군국주의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 이자 생명의 가치 : 방수를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함의 맨 밑바닥에 있던 수병들은 전기가 끊어진 암흑 속에서 모두 익사하고 맙니다. 함의 상부에서 하부를 연결하는 해치를 모두 잠가 버렸으니 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급격히 차오르는 해수를 온 몸으로 느끼며 죽어 갔을 것입니다.)

 

이 조치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야마토의 속력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타 장치가 사용 불능이 되고 속력이 떨어지자 야마토는 좌현 방향으로 목표도 없이 표류해 가고 말았다.

 

정교한 정밀기계장치 처럼 작동하는 미군의 공격

 

 

 

 

먼저 급강하 폭격기가 폭탄을 전함의 상부에 투하하여 화재와 파괴를 일으키고 퇴각하면

 

 

 

 

그 뒤를 이어 고속의 헬캣 전투기들이 전함의 대공 포좌를 겨냥해 기관포를 발사하며 들어오고

 

 

 

 

일본군이 여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해수면에 스칠 듯이 저공으로 비행하는 어벤저 뇌격기 들이 함의 옆 부분을 어뢰로  공격하는 사전에 면밀히 잘 조율된 공격의 반복이 계속 되었습니다.

 

 

 

 

미군 폭격기의 내습은 계속되어 전함의 대공포좌 (Turret) 가 계속해서 파괴 되어 나갔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폭탄 때문에 야마토의 상부는 갈갈이 찢기고 강판은 폭탄 구멍으로 가득차 있었다.

 

기울어진 갑판에 승무원들의 피가 흐르고 폭탄에 찢겨져 버린 팔, 다리와 살점이 부풀어 오른 금속 덩어리의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생존자들은 전투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적기의 기총탄에 3연장 25mm 기관포의 포수가 쓰러지자 한 수병이 시체를 밀어내고 사격을 계속했다.

 

잠시 후 헬 다이버가 투하한 폭탄의 파편이 포신의 한 가운데 맞고 수병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미군기는 되풀이 해서 공격을 가했다.

 

14시 07분 야마토는 다시 우현에 어뢰 1발을 맞았다. 그로부터 10분도 지나기 전에 3발의 어뢰가 갈기갈기 찢긴 좌현에 다시 명중했다.

 

야마토는 이미 파괴된 해상 유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있는 야하기 호

 

단 1대의 공중 지원도 받지 못했던 제 2 기동함대에게 이러한 결과는 사실상 미리 예견되어 있던 것이었다.

 

제 2 기동함대의 장병들은 분전했지만 넘치는 의욕과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 태평양의 심연속으로 빠져들며 그들은 미군보다 이런 어이없는 작전을 세운 해군 군령부를 더 저주하지 않았을까 ?

 

(실제로 이 작전을 계획한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대장과 그의 참모들은 동경 인근의 히요시에 있는 안전한 지하벙커에 들어앉아서 무모한 작전을 여러차례 감행함으로써 일선에 있는 장병들을 격분케 한 바있다.)

 

이 사이에 야마토를 방어하고자 노력하던 야하기 호는 단 1발의 어뢰로 항행 불능이 되어 있었다.

 

이 무력한 순양함에 미군기가 무리를 지어 달려들었다. 다시 6발의 어뢰와 수십발의 폭탄이 야하기에 치명타를 가했다.

 

14시 05분 야하기는 침몰했다.

 

그 무렵까지 야마토의 경사는 30도를 넘어 계속 기울어 지고 있었고 이제 곧 완전히 옆으로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함장 아루가 대령은 함과 함께 가라앉을 각오를 굳히고 나침반의 대좌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그는 이토 중장에게 말했다. “제독님은 귀중한 몸이십니다.

 

부디 승무원과 함께 퇴함하십시오”

 

그러나 이토 중장 역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궈 버렸다.

 

이것이 해군 내에서 기쿠스이 작전을 가장 반대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확실한 죽음을 향해 10 척의 함선과 수천의 휘하 장병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역할을 해야 했던 이토 중장의 마지막이었다.

 

부장인 노무라 대령은 단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함에 걸린 천황 (일왕) 의 사진이 혹시라도 미군의 손에 넘어 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함장실에 걸려 있었다. 노무라는 함내 통화장치로 연락을 취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놓았다.

 

제 9 분대장 핫토리 신로쿠로 대위가 이미 일왕의 사진을 떼내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궈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안심한 (?) 노무라 대령은 부장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버티던 4명의 어린 견시병 (lookouts) 들을 몽둥이로 후려쳐서 퇴함시켰다.

 

함대의 기밀 서류와 암호를 담당하던 장교들도 자신의 서류들과 암호 책자들을 움켜 쥐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목숨과 해군의 기밀을 맞바꾸었다.

 

14시 23분 야마토는 전복하여 폭발 하였고 거대한 불기둥을 하늘 높이 뿜어 올렸다.

 

이 광경은 북동쪽으로 200km나 떨어진 큐슈 남단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이로서 기쿠스이 작전의 수상 특공부대였던 제 2기동함대는 사실상 사라졌다.

 

참담한 패배였다.

 

 

 

 

불타는 야마토 주변에 미군기의 폭탄이 떨어져 야마토의 좌현 바로 옆에 거대한 물기둥을 뿜어 올리고 있다.

1시간 45분에 걸친 격렬한 전투가 마침내 끝이 났다.

 

 

 

 

 


불길과 연기를 남긴채 전함 야마토는 태평양의 심연으로 가라 앉았다. 야마토의 생존자들을 구하려 다가가는 3척의 구축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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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츠 제독이 미 해군의 비밀 무기라고 부른 "울리히 환초"에 정박중인 소위 "살인자" 함대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사진.

 

기동 부대는 대형 항모 2척과 그 보다 소형인 항모 2척이 기동 부대의 핵심이 되어 약 300대의 항공기를 탑재하고 있었고 그 둘레를 전함이나 순양함 같은 대형 함정이 방위진을 펴고 그 주위를 다시 30척의 구축함이 에워 싸고 있었다.

 

1. "귀하가 하는가 우리 측이 하는가 ?"

 

1945년 4월 7일

 

기쿠스이 I호 작전의 해상 작전부대 (야마토 외 9 척)는 목적지점을 향해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그들의 출항에서부터 정찰기와 잠수함을 통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함대가 분고 해협을 나서자 2 척의 미군 잠수함 USS THREADFIN (SS-410) 과 USS HACKLEBACK (SS-295)이 그들을 추적하여 즉시 그 위치를 제 58 기동부대 (TF 58)에 보고했다.

 

그 사이 미군 측에서는 야마토의 격침을 두고 견해 차이가 표면화되고 있었다.

 

제 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키나와 근해에 있던 대규모 미군 수상함대를 동원하여 야마토를 격파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 전함의 수병들은 최근 수 개월동안 해안 포격이나 항모호위 등의 임무만을 맡아왔기 때문에 함 대 함의 수상전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 58 기동함대의 지휘관 미처제독은 휘하의 함재기 조종사들이 일본 해군의 상징 야마토를 격침시킬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참모장인 앨리 버크 준장에게 명령을 내려서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정오에 일본 함대를 공격하기로 한다”는 뜻을 스프루언스에게 전하도록 했다.

 

앨리 버크는 좀 더 간단명료한 전문을 보냈다.

 

“귀하가 하는가 우리 측이 하는가 ?”

 

스프루언스는 아쉽지만 양보했다.

 

“귀관에게 맡긴다.”

 

 

 

 

"제독들의 제독"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해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후송된 Willam "bull" halsey 의 뒤를 이어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부터이다. 이전부터 각종 함정의 지휘관으로 실력을 쌓아 왔고 위의 대화에서도 드러나지만 공명심이나 언론의 관심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언제나 냉정하고 치밀한 상황 판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마법사" 미처 (MARC A. MITSCHER) 와 참모장 앨리 버크 준장

 

제 58기동부대의 사령관 마크 미처중장은 전술가로서 마법사에 비유되었다.

 

미처는 온화하면서도 용감한 지휘를 보여 주어 장교와 수병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친구 HALSEY 제독에 의하면 미처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당시의 미 해군에는 훌륭한 지휘관들이 많았고 부하들에 대한 애정어린 배려와 몸을 사리지 않는 용기는 어려운 임무를 맡고 있는 휘하 장병들에게 참으로 귀감이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 남긴 회고록이나 인터넷의 글에서도 미 퇴역 군인들은 그들의 전시 지휘관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는 극한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낸 진정한 전우애에서 우러나온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존경할 대상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2.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켜라 !

 

“조종사들은 각자의 항공기에 탑승하라!” 오키나와 근해에 있던 12 척의 미군 항모 승무원 대기실에는 마침내 이와 같은 명령이 흘러 나왔다.

 

1945년 4월 7일 10:00시

 

전투기, 뇌격기, 폭격기등 280 대의 해군기로 편성된 공격대 제 1진 (FIRST WAVE) 가 항모에서 일제히 출격하여 북방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공격대의 목표는 일본 함대를 모두 격침시키는 것이었다. 공격 목표물 중에 일본 최고의 전함 야마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행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12시32분 야마토의 레이다가 적기를 포착했다. 즉시 기동부대의 각 함으로 긴급신호를 발했다.

 

확성기가 그 사실을 알리고 나자 함내는 오히려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견시병들 (LOOKOUT) 이 미군기를 포착했다.

야마토의 항해장이 외쳤다.

 

"적기는 백 대이상 현재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 !“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사격 개시 !”

 

야마토의 대공 포화가 불을 뿜었다.


 

 

 

야마토의 탄막을 뚫고 급강하 폭격기 헬 다이버 (HELL DIVER) 2기가 교묘하게 침입해 왔다.

 

12시 41분 2기의 헬 다이버는 폭탄을 야마토의 메인 마스트 부근에 명중시켜 그 뒤 편의 레이다 실을 파괴하고 8명의 수병을 죽였다.

 

4분 후 어벤저가 발사한 어뢰 하나가 야마토의 좌현 앞부분에 명중했다.

 

이윽고 미군기는 공격을 중단하고 각기 모함으로 돌아갔다. 제 1진의 공격이 끝이 났던 것이다.

 

야마토의 장교들은 단 한 발의 어뢰정도로는 이 거대한 전함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항해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용케도 한방 먹였군”

 

그러나 제 2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이토 중장은 그렇게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습으로 희생된 수병들의 시체가 함교에서 실려나오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최악의 사태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보 론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남자.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 구사카 류노스케

 

텐이치고 작전의 제 2 기동부대 지휘관인 이토 세이이치 제독이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

 

1. 수상함대에 대한 항공지원이 전무함 (히요시에 있는 연합합대 사령부는 단 1대의 항공기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2. 수상함대의 수적 열세 (우리 측 (일본측을 말함) 은 모두 10척인데 반해 적은 최하 60 척 정도로 추정된다)

 

3. 출항 시간의 지연 (기습의 이점 상실)

 

에 대하여 제 2 기동부대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 (장성에서 위관급까지) 이 공감을 하고 불만을 표하자 급기야 히요시에 있는 연합 합대 사령부에서는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이토 세이이치의 해군병학교 동기생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를 직접 보내 이토 제독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끝까지 과연 이 작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회의하는 이토 세이이치에게 궤변을 늘어놓던 구사카 류노스케는 다음과 같은 작별의 말을 남긴다.

 

"자네는 항복을 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하려 하는 1억 일본인들을 대표하여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네"

 

그러자 철옹성같은 위계질서의 일본 해군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8척의 구축함 함장 중 1명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구사카 참모장과 수행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제국 해군의 운명이 이 결전에 달렸다면 도요타 소에무 제독 (연합함대 사령관) 이 히요시의 벙커에서 나와서 직접 지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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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연회

 

 

 

 

 

야마토의 지휘부 : 전쟁 초기와 말기의 사진.

 

야마토는 한때 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으로 최고의 대우 (심지어 급식에서도 !! 다른 해군 장병들과는 달리 전쟁 말기까지 "쌀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를 받았고 이는 승무뭔 선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야마토에 탑승 하고 싶어 했고 승무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군국주의 일본군의 상징이자 일본군 장교들의 호사 취미중 하나 였던 명검 수집. 현대의 샐러리 맨들이 고급 차를 사려고 무리를 하듯이 그 시절에는 이름있는 장인들의 일본도를 사기 위해 빚을 지기도 했다는 군요)

이 사진속의 일본도를 주목해 주세요. 소위 "일본 무사도"를 상징한다는 일본도가 후에 어떻게 사용 되는지는 5 ~ 6 편에서)

 

1945년 4월 5일 17시 30분. 작전 개시 전야의 야마토 함상

 

모든 승무원에게 사케 (sake) 가 배급 되고 마지막 연회가 시작되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이었기에 그 순간이 더 소중했는지 모른다. 평소의 엄격한 규율은 느슨해졌고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웃음이 피어 올랐다.

 

승무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두고 온 고향의 노래를 불렀고 계속 술을 마셔 댔다. 엄연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더 크게 웃고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사관실 (WARDROOM) 에서는 야마토의 초급 장교들이 모여있었다.

 

건배를 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리던 도중 보조 항해사 (ASSISTANT NAVIGATOR) 스즈키 소위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일순간 사관실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누구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사관실의 모든 사람들이 스즈키 소위를 노려보고 있을 뿐.....

 

애써 감추고 했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다시 그들을 휘감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고 그것은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함장과 부장이 양손에 사케를 들고 사관실을 찾아왔다.

 

50여명에 달하는 초급장교들은 함장과 부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취중에 함장의 대머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 부장의 옷을 잡아 당겨 찢어 버리기도 했다. 평소였더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 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모든 것이 허용되는 밤이었다.

 

2. 어머니의 편지

 

통신장교 나카다니 소위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룸메이트인 요시다 소위 (레이다 장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나카다니 소위는 요시다 소위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카다니 소위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NISEI) 였다. (즉 그는 일본계 미국인인 미국 국적자이던 것이지요.)

 

게이오 대학에 유학 도중에 해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그의 두 동생들은 유럽 전선에서 미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청년으로서 오직 그만이 미군의 긴급송신문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니세이라는 이유로 그의 몇몇 상급자들은 많은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모욕하고는 했다.

 

그럴때면 그는 갑판에 홀로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정성스런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있다.

 

부디 네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오랫동안 기다려온 어머니의 편지였다.

 

그 동안 여러 동료들이 친구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누릴동안 오직 그만이 그런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출격 전야에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참고 : 이 편지는 연합국과 일본의 유일한 교섭로 였던 중립국 스위스를 거쳐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수 많은 괴롭힘에도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나카다니소위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요시다소위는 말없이 편지를 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참고 : 2차세계대전중 (일본에 의한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에서는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강제 소개명령이 내려져서 대부분 서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량한 중서부 오지에 위치한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아마 나카다니 소위의 어머니도 이런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23 : 00

 

함내의 통신시설 (PA)을 통해서 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군들 오늘 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우리의 임무로 돌아간다.

 

최선을 다해 주기바란다. 이상."

 

예전처럼 엄격한 말투였지만 왠지 부장의 음성은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애정어린 목소리 였다고 요시다 미츠루 소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제 축제는 끝이 났고 마지막 결전만이 야마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일본 해군 주요인물


연합 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

 

제 2 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 중장

 

제 2 수뢰 전대 사령관 고무라 게이조 소장

 

야마토 함장 아리가 고사쿠 대령

 

야하기 함장 하라 다메이치 대령

 

야마토 부장 노무라 지로 대령


 

 

 

P.S. 이 글에서 승무원들에 관한 내용은 실제 야마토의 승무원이자 생존자였던 요시다 미츠루 (YOSHIDA MITSURU) 의 "REQUIEM FOR BATTLESHIP YAMATO" (번역 : RICHARD H.MINEAR) NAVAL INSTITUTE PRESS를 참고했습니다.


보 론


(1)

 

1943년 전황이 악화 되자 일본은 문과 대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를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강제 징집에 나서게 되는 데요.

 

이때 평소 엘리트 주의를 표방하며 육군과 사사건건 대립해오던 해군과 육군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악명을 익히 알고 있던 많은 대학생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심지어 해군에의 입대를 "국내 망명"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일본 유수 대학의 많은 대학생들이 해군에 장교로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 (T T) 이들도 결국 지옥을 경험하게 되지요]

 

제가 참조한 위 도서의 저자 요시다 미츠루씨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었던 학도병 출신이었습니다

 

많은 사관들은 마치 악마처럼 난폭하게 행동했다. 직업 군인들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학도병의 사소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 할 때 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대 전원에게도 가혹한 체벌을 가했다.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학도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생지옥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문을 들어선 후 얼굴 모양이 바뀔 정도로 구타를 당하는 “맹훈련”의 날이 계속 되었다. 1945년 1월 2일 아침은 카네코라는 소위에게 20번이나 얼굴을 맞아 입안이 갈기갈기 찢어져 고대하고 있던 새해의 떡국을 먹지 못하고 피를 삼키며 지냈다. 2월 14일은 같은 부대의 거의 전원이 외출했을 때 농가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밤에 7시간이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몽둥이로 개, 돼지처럼 엉덩이를 맞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리고 한 사람씩 사관실에 불려 들어 갔는데 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사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타 당했다. 얼굴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다시 일어서면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맞아 나가 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마루 끝에 부딪혀 중태에 빠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이러한 야만스러운 짓을 한 사람은 분대장 츠츠이라는 중위로 우리들은 아직도 이 남자를 찾고 있다.

 

직업 군인들은 종종 말단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현재의 지위에까지 오른 자들로 학도병들은 이들 직업군인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는 자신과 비교하여 학생들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특권계급 출신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2)

 

아래의 문장은 카스가 타케오 씨의 1995년 6월 21일자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카스가 씨가 이 편지를 쓴 것은 85세 때의 일이다. 해군에 소집되어 츠치우라 해군 기지에서 학도병을 위해 식사, 세탁, 방 청소 그 밖의 시중을 맡은 그는 출격전야의 대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러기 룸에 송별의 주연석을 준비함. 내일 출격하는 젊은 사관들의 술자리는 데우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거나 벌컥벌컥 마시기 ! 결국에는 모든 것이 수라장으로 변하여 어두운 막장 아래의 전등을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양손에 치켜든 의자로 창유리를 와장창 차례로 부수며, 새하얀 테이블 보도 찟겨져 나간다. 군가는 욕하는 소리처럼 서로 뒤 섞이고 등화관제가 실시되는 군대에서 여기 기러기 룸의 술자리는 별세계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오늘밤만의 목숨. 부모, 형제, 자매의 얼굴 모습,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같이 돌고 도는 상념은 끝이 없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 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서라고, 젊은 고귀한 청춘의 목숨을 바칠 각오는 다짐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팔짱을 끼고 명상하는 사람, 엉망이 된 송별회장을 떠나는 사람, 몇 시간이나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 처참한 출격 전야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학도병사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른 아침 비행장으로 달려가 지난밤에 물이 아닌 찬술을 나누어 마신 용사는 히노마루의 머리띠를 매고 용감하게 높은 폭음을 내며 출격 ! 나는 영령이 되신 분들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훈련 뒤에 매일같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기합이 계속되었다.”

 

카스가 타케오는 매일 같이 당한 구타의 후유증으로 현재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관들은 “군인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체벌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편지는 지원자들이 죽음 전야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 오오누키 에미코 저 / 모멘토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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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는 게으르고 무능한 제독들 때문에 떠 있는 호텔이다."


                                                 - 익명의 일본해군제독


"야마토를 해체 하여 그 재료로 항공기를 더 생산하자"
 

                         -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

 

 

 

 

야마토의 모습 : 사진속의 사람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거대한 전함인지 실감하게 된다.


1. 야마토를 둘러싼 논란

 

한때 일본 해군의 자랑 이었던 야마토가 이렇게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서 화려한 함대간 격전과 그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일본 해군 고위층에서는 거함대포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진리 그 자체였다.

 

1920~30년대 각국 해군은 해군 항공 (Naval aviation)의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세는 역시 거대전함 중심주의였다. 이는 비단 일본에만 국한 된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은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미약했다.

 

대개 해군 항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영관급이나 젊은 장교들이었지만 결정권을 가진 고위 장성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더구나 여기에는 해군 항공과 수상 함대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한 몫을 했다.

 

 

 

일본 해군의 화려한 나날들 - 진주만, 인도양을 종횡무진 누볐던 아카기호의 함상 지상요원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항공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전 세계에 해군 항공의 진가를 보여준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와 "리펄스" 함을 격침시킨 것은 야마토와 같은 거대 전함이 아니라 일본 해군항공의 전투기들과 뇌격기들이었다.

 

대세는 해군 항공으로 기울고 있었고 더구나 함대가 그 능력을 발휘하기위해서도 그들을 적 항공 부대로 부터 보호해줄 항공 부대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야마토의  엄청난 연료소비량 (3,400톤) 은 미군의 잠수함대와 남서 태평양 탈환으로 보급선이 끊어진 일본 해군의 열악한 유류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야마토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주요 해전에 항상 참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토 1대의 유류소비량이면 구축함 수 척을 운용할수 있다는 것을 아는 해군 일각에서는 실랄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었다.

 

야마토는 대체로 함대의 기함 (flag ship) 으로서 항상 보호를 받거나 후미에 있으면서 귀중한 연료를 소비하는 데 상선단을 호위하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여타 전투 부대 장병들의 야마토에 대한 시선은 차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해군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전함 야마토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속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2. 드디어 출격이다 !

 

1945년  3월 29일 구레(KURE) 군항

 

야마토의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맹훈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고 내습하는 미 해군 58 기동부대의 함재기들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야마토에 대한 출항 명령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힘든 훈련으로 차라리 실전이 시작되면 이런 훈련들은 받지 않아도 되니 어서 전선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병들도 많았다.

 

장교들도 언제쯤 출항하는지 그들의 상대가 누가 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라는 명령이 전해진 것이다 !

 

18.1 인치 포탄 1170발, 제 2주포탄 1620발, 대공포탄 13500발, 소형기관총탄 1,150,000을 만재한 야마토에는 긴장감과 함께 이제는 우리도 전선에 투입된다는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3. 최후의 방어선 오키나와

 

 

 

 

 

 

필사의 항전 : 기쿠스이 작전의 일환으로 감행된 가미가제 공격


- 다음은 당시 특공기 호위를 명령받은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가 남긴 메모의 내용이다.

 

"우리 중대에 주어진 임무는 최선의 것이라고는 할수 없다. 중대장 대리로서 나는 전황이 한층 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국은 절박해지고 있다. 갈아 입을 옷을 지급받는 일도 드물다. 패배했으나 정복된 것은 아니다. 제65비행중대의 조종사는 따로따로 태어났으나 한 날 한 시에 죽는다."

 

결국 이 글을 쓴 소노다 대위는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되어 사망했다.

 

그의 유해에서 피로 물든 메모와 비행도가 미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 침공부대는 우시지마 중장 (육군)의 지연 작전에 의해 오키나와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상외로 오키나와를 방어하고 있는 일본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미 침공함대는 육상부대의 호위와 보급선 유지라는 역할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이에 일본 군부는 미군 함대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군의 엄청난 규모에 대항한 수상함대의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은 가미카제 특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구상했고 운용가능한 거의 모든 항공기를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대규모 특공 공격을 노린 이 계획은 "텐이치고 작전"이라고 불리웠고 그것은 수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기쿠스이 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야마토는 텐고오 작전의 일환으로 제 5 항공함대 사령관 우가키 중장이 지휘하는 특공기가 오키나와 주변지역의 적 함정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기 위해 경 순양함 야하기호 외 8척의 구축함을 대동하여 제 58기동부대의 항모군을 오키나와 근해로부터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군 함재기와의 전투에서 이들 함정중 1척이라도 살아 남으면 오키나와까지 항해를 계속하여 그곳 해변에 스스로를 좌초시켜 해안 포대로서의 구실을 하여 미군 상륙함대를 포격하고 함포의 포탄이 바닥나면 승무원들은 미군들과 백병전을 벌이다 죽는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목표였다.

 

야마토의 이 임무자체가 사실상 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일본 해군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전함 야마토는 적 함대와 대결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 조차도 사치에 해당하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처한 냉엄한 현실이었다.

 

P.S.

 

1. 다음 편에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 해야 하는 야마토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이런 자살과도 같은 임무를 둘러싼 일본 해군 내부의 갈등 그리고 일본 해군의 상징인 전함 야마토를 공략하려는 미 해군측의 전력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조종사 기근이 가져 온 악순환

 

 

 

 

"BURNING HELL" 미드웨이 해전의 가장 큰 피해 사항 :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이 불타는 항모에서 거의 몰살을 당하면서 귀중한 인적 자원인 숙련 조종사들을 대거 잃게 되었고, 그 빈 자리를 제대로 된 비행 시간을 갖지 못한 미숙련 조종사들이 메우게 되면서 1944년 마리아나 제도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미 해군측에 일방적인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미군 비행사들이 '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 이라 부른 공중전)

 

 

 


승자의 환희 : "몇 대나 격추시켰냐 ?" 는 지상 요원의 질문에 답하는 해군 비행사의 모습 

 

제공권을 잃게 된 일본 해군은 수상 함대의 활동도 함께 부진해지고 보급, 병력 증원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동안 점령했던 남 태평양의 군사적 거점 들을 하나, 둘 상실하게 되고 점점 일본 본토로 접근해 오는 미군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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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야마토를 아십니까?

 

2차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대, 최고 성능의 전함으로 연합국을 긴장시켰던 일본 해군의 전함 야마토는 전쟁 초기에  태평양을 제패 했던 일본연합함대의 상징이었습니다.

 

한때 자매함 (sister ship) 무사시 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거함대포주의 (巨艦大砲主義) 의 대표 주자로 큰 기대를 모았던 야마토는 전쟁 말기 너무나 허망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하고 말았습니다.

 

소위 욱일승천의 기세로 전 아시아를 지배 하고자 했던 일본의 야욕과 함께 탄생하여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종말을 예언이라도 하듯 태평양의 심연으로 침몰하고만 전함 야마토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시험 항해중의 야마토 : 이때만 해도 나날이 승승장구하는 일본해군의 상징으로 또한 거함대포주의의 선두주자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1. 저물어가는 태양

 

전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한때 태평양을 움켜 쥐었던 일본의 연합함대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한때 침체되었던 미 태평양 함대는 서서히 그 가공할 힘을 보여주고 있었고 연합 함대는 분전했지만 미드웨이의 패배를 극복하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  미 태평양 함대를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멸시키고자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야심찬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미 해군은 진주만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고 일본 연합함대의 행운의 별은 빛을 잃어갔다.

 

전쟁 후 1,2 년은 크게 떨치리라는 야마모토 제독의 근심어린 예측이 그대로 맞아들어 가는 듯 했다. 그러던 중 야마모토 제독 마저도 1943년 4월 18일 부갱빌 상공에서 미군기의 요격에 의해 격추 되어 사망하고 만다. 일본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자 미국으로써는 미드웨이 해전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한때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했던 그는 국력의 차이를 들며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처음에는 무모한 전쟁을 피해 보려했던 의식있는 (?!) 군인으로 군신으로 미화되기도 했으나 후세 그의 지휘를 받았던 하급 지휘관과 병사들은 그런 미화에 대해서 냉소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후 전쟁 책임을 육군 지도부에 떠넘기기 위해서 해군이 그의 실체를 윤색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때 일본군의 아성이었던 남 태평양은 이제 일본군들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의 해군 항공전력도 숙련된 조종사들의 늘어나는 전사로 인해  그 빛을 잃고 있었다. 해군 최고의 ACE로 손꼽히던 사카이 사부로도 한쪽 눈을 잃고 본국으로 귀환되고 만다. 일찍이 너무나 엄격한 기준으로 조종사들을 양성했던 일본 해군은 이제 심각한 조종사 기근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ACE 들 : 사카이 사부로 (上) 와 "라바울의 악마" 니시자와 히로요시 (下)

 

사카이 사부로는 "라바울의 악마" 니시자와 히로요시와 함께 일본 해군항공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30년대말 중국전선에서 부터 태평양전쟁 개전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기습, 남태평양 상공까지 그는 일본해군의 예리한 칼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와 그의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참한 죽음과 패배였다.

 

더구나 태평양의 공포로 불리우던 ZERO전투기도 미국의 신예 HELLCAT과 충분한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미군 조종사들을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F6F HELLCAT : F4F WILDCAT의 후계기로 태평양전쟁 당시 미해군의 주력 전투기로 활약했다. 미군특유의 두터운 장갑으로 인해 왠만한 피탄에는 문제없이 귀환이 가능했고 조종사의 생존률도 높았다. 더구나 .50 구경 기관총 6문을 장착한 HELLCAT은 일본 조종사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전후 50년이 지났지만 기관총을 발사하며 자신을 추격하는 HELLCAT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 태평양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나온 전직 일본 해군 조종사의 인터뷰 중에서)

 

계속되는 패배를 만회해 보고자 거의 모든  전력을 다 동원 하다시피하여 승부를 걸었지만 (레이테만 해전) 결과는 참담 했다.  더구나 정상적인 항공 작전이 어려워지자 이때부터 가미가제 특공대를 이용한 전술이 정식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기대를 모았던 거함 무사시와 야마토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무사시는 결국 시부얀해 해전에서 격침되고 말았다.

 

 

 

한때 일본 연합함대의 총아 였던 야마토였으나 레이테 만 전투때는 미국 항모부대를 추적하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한 끝에 결국 전선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항모 츠이가쿠의 최후 : 대다수의 승무원이 함과 운명을 같이 했다.

 


* 레이테만 해전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피해상황비교

 

- 미 해군 : 고속항공모함 1, 호위 항모 2 , 구축함 2, 호위 구축함 1 / 병력 손실 : 3000명

 

- 일본 해군 : 항모  4, 전함 3, 중 순양함 6, 경 순양함 4, 구축함 9  / 병력 손실 : 10,000명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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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조리 하지만 현실에서는 목소리 크고 무식한 놈이 이긴다.

전시 내각을 휘어 잡고 있던 육군 수뇌부의 입김이 결국 미국과의 일전을 결심하게 만들고 미국과의 전쟁에 회의적이던 해군도 육군의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전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적나라 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2. 엘리트 교육의 폐해

군국주의 일본 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에다지마" 해군 병학교
 
비록 가난한 수재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 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장교들을 길러낸 요람이기는 했지만 "해먹넘버"로 일컬어지는 철저한 성적위주의 교육과 하급자, 후배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행, 가혹행위, 일본 해군의 카스트 제도로 불리우는 철저한 계급우위의 경직된 인사체계의 초석을 놓음으로 인하여 그 장점들을 다 상쇄시킨 실상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자 하라 다메이치의 이런 행태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마치 극동의 어떤 나라처럼 소수의 선각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악습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행태도 놀랄 정도로 똑같았습니다.)   

3. 해군의 딜레마

제가 지난 번에 쓴 글에서 언급 했듯 진주만 공격부대를 지휘했던 나구모 주이치 제독도 미국에서 수학하며 미국의 산업생산력을 비밀리에 연구했던 사람으로서 미국과의 전쟁에 회의적이었으나 진주만의 대성공과 필리핀 침공, 영국의 리펄스 ,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의 격침으로 사기가 오르자 자신들의 성공에 도취되어 결국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맞이 하게 됩니다.

4. 우수하고 용감한 군인일수록 먼저 죽는다.

한때 태평양 전역을 호령했지만 미드웨이의 패전과 과달카날 해전 (남태평양전역)으로 승기가 꺾여버린 일본해군. 계속되는 전투와 압도적인 적의 물량공세에 하나하나 태평양의 심연속으로 사라져 가고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를 거듭하는 일본 구축함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5. 전장에 피어나는 인정 

"불침 함장"으로 해군에 명성을 떨치게 된 하라 다메이치 함장이 남 태평양에서 일본으로 전속 명령을 받고 살아 돌아오자 항구의 해군을 상대하는 레스토랑의 나이 든 여주인 (40년 가까운 세월을 해군기지 앞에서 영업을 해온 사람으로 해군 수병이든 해군 제독이든 누구에게나 이름을 부르는 전설적인 인물. 심지어 자신이 젊었을 때 만난 쓰시마 해전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을 언급하는........) 이 평소와는 다르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자신이 장병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장면에서는 일본과의 악연을 가진 나라에 사는 독자이지만 국적을 넘어 숙연한 감정까지 느껴졌습니다.

6. 지피지기

이 책의 저자인 하라 다메이치는 자신의 적이었던 미국 해군의 장, 단점을 냉정히 분석함과 동시에 일본 해군이 전쟁에서 어떻게 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자신의 경험과 고위 장교로서 그가 접하게 된 해군 수뇌부들의 언행을 가감없이 제시함으로써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7. 미국이라는 나라의 무서움


1930년대에 이미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오렌지 계획) 치밀하게 준비를 해둔 미 해군.

 

 

전후에도 전쟁 중 적이었던 일본 해군 출신의 저자들이 출판한 전쟁사의 고전들을 꾸준히 번역 (naval institute) 하여 자국의 장교와 연구자,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읽게 하고 있습니다.    

- 과달카날 해전을 다룬 추천도서

 

사 족

일본 해군의 패망에는 1차대전 이후에 해양 강국사이에서 체결된 런던 해군 군축 협정이 그 한 축을 차지 하고 있습니다. 한때 자신들의 수제자였지만 슬금 슬금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는 일본의 해군력을 주저 앉히기 위해 일본에 불리하고 불평등한 협정안을 제시하는 미국과 영국의 압력과 회유에 일본은 자국에 불리한 협정을 체결하고 맙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 사실은 일본의 패를 다 읽고 있었던 포커 플레이어 미국 *^^*)

국내에서 이 협정체결에 엄청난 반대여론이 조성되지만 한 번 체결된 국가간의 협정을 번복할 수 는 없는 일.

군함당 보유 비율을 명시한 협정 내용을 교묘히 회피 하고자 "양보다 질이다"를 외치며 일기 당천의 슈퍼 전함건조 (야마토, 무사시 등) 에 열을 올리지만 결국 수 년사이에 형성된 미국과의 격차와 상대가 가진 엄청난 공업생산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때 태평양을 지배했던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전함 야마토의 격침과 함께 패망하고 맙니다.

공교롭게도 요즘 어떤 나라도 어떤 나라와 "군사"협정을 맺으려 했었지요 ...........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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