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의 Inter-View]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②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620&ref=nav_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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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HTER PILOT

일 반 2015. 5. 19. 21:37

 

 

 

 

 

전투 조종사가 되는 것은 오토바이 갱단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갱단 가입과 전투 조종사가 되는 것의 차이점은

우리 엄마가 아직도 나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 어느 전투 조종사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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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때 중부전선 도솔산전투라는게 있었어. 인민군이 쎄서 우리 육군이 혼난 곳이지.

육군이 당해내지 못해 우리 해병이 교체해 올라갔다지. 해병 하사관들이 죽음의 고지로 올라가며 악이 받쳐 육군장교들의 조인트를 깠다는 거야. 병신 새끼들이라고. 당연히 우리 귀신잡는 해병은 인민군을 궤멸시켰지. 그때의 육군장교들이 요증 국방 지휘부라는 거야. 그들이 아니꼬운 해병을 쳐버린 게지"

- 김재규 정부부의 궁정동 의전과장이었던 예비역 해병대령 박선호.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해체 (외형은 해군에의 통합) 에 분격하며.

 

 

10·26 당시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영화처럼 건들거리고 빈정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의 이력과 군사재판에서의 답변 태도, 최후진술 등이 그 근거다. 그는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으로 해병대학에서 수석 졸업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 중 진급이 가장 빨랐던 만큼 성실하고 충직했다.

 

 

대통령의 비밀 연회장에서 술과 여자 조달을 맡아 그는 ‘채홍사’로 불렸다. 법정 진술에서 그는 매우 고민했으나 조직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일을 계속했다고 토로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더 이상 안 하려고 사표를 냈으나 부장님이 자꾸 자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 원문링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7373

 

사랑과 연민, 신뢰와 존경

 

 

김재규의 이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 역시 눈물겹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이번 혁명의 실제 주역은 명령을 하고 주도한 오직 한 사람, 바로 본인입니다. 일본에서도 5. 15사건이나, 2. 26사건이 있었을 때, 근위사단병력이 내각의 대신을 쏴 죽인 사건으로, 이 경우에도 주모자인 장교에게만 책임을 묻고, 그 외 하사관과 병졸은 무죄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는 명령이 결코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정보부는 군대 이상의 임무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박선호, 박흥주 두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고, 강하게 명령했습니다. 특수 조직의 생리를 감안하여 각별히 정상을 참작해주기 바랍니다.”(1심, 7차 공판진술)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양같이 순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착하기 때문에 저와 같은 사람의 명령에 무조건 철두철미하게 복종했으며, 또 나는 그들에게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죄를 지었고, 저의 입장에서는 혁명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모든 원천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에게 극형을 내려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극형만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한 사람이었고 가정적으로도 매우 모범적이고 결백했던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사관학교에 지망했던, 지금 선두로 올라오는 대령입니다.” (1심, 최후진술)

 

 

“나는 10. 26혁명의 처음이요, 끝이요 전부입니다. 오직 나의 책임인 것입니다. 재판부 여러분께서는 이 사건의 성격 자체와 역사적 관점에서 심판해 주십시오. 아무쪼록 법률조항에 매달리지 마시고, 내 부하와 불쌍한 가족들을 각별히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2심, 최후진술)

 

 

그 상관에 그 부하라고 할까. 박선호 역시 그의 부하들을 이렇게 변호한다.

 

“여기에 제 부하였던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유석술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나왔고, 제가 지시한 대로 내용도 모르고 따라 하다가 이 법정에 서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쪼록 이 부하들에 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해 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2심, 최후진술)

 

 

이들은 항소심 선고가 끝나던 날 (1980년 1월 28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가 헤어졌다. 선고가 끝나자 김재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선호 등 5명의 부하들과 일일이 생전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악수를 나누었다.

 

 

김재규는 입술에 경련을 일으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두들 건강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법정을 떠났다. 또한 그가 죽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나는 내 동지, 나를 포함해서 7명이 됩니다만, 이 동지들은 나와 이념을 같이하고, 이 혁명에 가담했던 나의 동지들입니다. 이 동지들은 지금도 자기의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 이상으로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졌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김태원이라고 하는 동지는 와전옥쇄라, 기왓장으로 온전한 것보다는 옥이 되어서 차라리 깨지겠다고 하니, 얼마나 숭고한 이야기 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지들, 참 귀중하고,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부하들입니다.”

 

 

5월 24일, 새벽 7시, 그는 사형을 집행 당하면서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부하들이 죽게 되면 언젠가는 함께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결국 이들 경비원들조차 내란주요임무 종사자로 몰려 전두환 군부에 의해 서둘러 처형되었다.

 

 

지금 김재규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 박선호는 고양, 박흥주는 포천, 이기주는 양주에 있다. 언젠가는 과연 김재규의 소원대로 그들이 함께 묻힐 수 있을까 ? 금년 5월 24일도 이미 지나갔다.

 

 

김정남 /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쓴 책으로 『진실, 광장에 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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