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는 게으르고 무능한 제독들 때문에 떠 있는 호텔이다."


                                                 - 익명의 일본해군제독


"야마토를 해체 하여 그 재료로 항공기를 더 생산하자"
 

                         -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

 

 

 

 

야마토의 모습 : 사진속의 사람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거대한 전함인지 실감하게 된다.


1. 야마토를 둘러싼 논란

 

한때 일본 해군의 자랑 이었던 야마토가 이렇게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서 화려한 함대간 격전과 그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일본 해군 고위층에서는 거함대포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진리 그 자체였다.

 

1920~30년대 각국 해군은 해군 항공 (Naval aviation)의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세는 역시 거대전함 중심주의였다. 이는 비단 일본에만 국한 된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은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미약했다.

 

대개 해군 항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영관급이나 젊은 장교들이었지만 결정권을 가진 고위 장성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더구나 여기에는 해군 항공과 수상 함대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한 몫을 했다.

 

 

 

일본 해군의 화려한 나날들 - 진주만, 인도양을 종횡무진 누볐던 아카기호의 함상 지상요원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항공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전 세계에 해군 항공의 진가를 보여준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와 "리펄스" 함을 격침시킨 것은 야마토와 같은 거대 전함이 아니라 일본 해군항공의 전투기들과 뇌격기들이었다.

 

대세는 해군 항공으로 기울고 있었고 더구나 함대가 그 능력을 발휘하기위해서도 그들을 적 항공 부대로 부터 보호해줄 항공 부대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야마토의  엄청난 연료소비량 (3,400톤) 은 미군의 잠수함대와 남서 태평양 탈환으로 보급선이 끊어진 일본 해군의 열악한 유류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야마토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주요 해전에 항상 참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토 1대의 유류소비량이면 구축함 수 척을 운용할수 있다는 것을 아는 해군 일각에서는 실랄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었다.

 

야마토는 대체로 함대의 기함 (flag ship) 으로서 항상 보호를 받거나 후미에 있으면서 귀중한 연료를 소비하는 데 상선단을 호위하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여타 전투 부대 장병들의 야마토에 대한 시선은 차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해군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전함 야마토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속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2. 드디어 출격이다 !

 

1945년  3월 29일 구레(KURE) 군항

 

야마토의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맹훈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고 내습하는 미 해군 58 기동부대의 함재기들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야마토에 대한 출항 명령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힘든 훈련으로 차라리 실전이 시작되면 이런 훈련들은 받지 않아도 되니 어서 전선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병들도 많았다.

 

장교들도 언제쯤 출항하는지 그들의 상대가 누가 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라는 명령이 전해진 것이다 !

 

18.1 인치 포탄 1170발, 제 2주포탄 1620발, 대공포탄 13500발, 소형기관총탄 1,150,000을 만재한 야마토에는 긴장감과 함께 이제는 우리도 전선에 투입된다는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3. 최후의 방어선 오키나와

 

 

 

 

 

 

필사의 항전 : 기쿠스이 작전의 일환으로 감행된 가미가제 공격


- 다음은 당시 특공기 호위를 명령받은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가 남긴 메모의 내용이다.

 

"우리 중대에 주어진 임무는 최선의 것이라고는 할수 없다. 중대장 대리로서 나는 전황이 한층 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국은 절박해지고 있다. 갈아 입을 옷을 지급받는 일도 드물다. 패배했으나 정복된 것은 아니다. 제65비행중대의 조종사는 따로따로 태어났으나 한 날 한 시에 죽는다."

 

결국 이 글을 쓴 소노다 대위는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되어 사망했다.

 

그의 유해에서 피로 물든 메모와 비행도가 미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 침공부대는 우시지마 중장 (육군)의 지연 작전에 의해 오키나와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상외로 오키나와를 방어하고 있는 일본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미 침공함대는 육상부대의 호위와 보급선 유지라는 역할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이에 일본 군부는 미군 함대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군의 엄청난 규모에 대항한 수상함대의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은 가미카제 특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구상했고 운용가능한 거의 모든 항공기를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대규모 특공 공격을 노린 이 계획은 "텐이치고 작전"이라고 불리웠고 그것은 수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기쿠스이 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야마토는 텐고오 작전의 일환으로 제 5 항공함대 사령관 우가키 중장이 지휘하는 특공기가 오키나와 주변지역의 적 함정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기 위해 경 순양함 야하기호 외 8척의 구축함을 대동하여 제 58기동부대의 항모군을 오키나와 근해로부터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군 함재기와의 전투에서 이들 함정중 1척이라도 살아 남으면 오키나와까지 항해를 계속하여 그곳 해변에 스스로를 좌초시켜 해안 포대로서의 구실을 하여 미군 상륙함대를 포격하고 함포의 포탄이 바닥나면 승무원들은 미군들과 백병전을 벌이다 죽는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목표였다.

 

야마토의 이 임무자체가 사실상 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일본 해군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전함 야마토는 적 함대와 대결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 조차도 사치에 해당하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처한 냉엄한 현실이었다.

 

P.S.

 

1. 다음 편에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 해야 하는 야마토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이런 자살과도 같은 임무를 둘러싼 일본 해군 내부의 갈등 그리고 일본 해군의 상징인 전함 야마토를 공략하려는 미 해군측의 전력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조종사 기근이 가져 온 악순환

 

 

 

 

"BURNING HELL" 미드웨이 해전의 가장 큰 피해 사항 :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이 불타는 항모에서 거의 몰살을 당하면서 귀중한 인적 자원인 숙련 조종사들을 대거 잃게 되었고, 그 빈 자리를 제대로 된 비행 시간을 갖지 못한 미숙련 조종사들이 메우게 되면서 1944년 마리아나 제도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미 해군측에 일방적인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미군 비행사들이 '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 이라 부른 공중전)

 

 

 


승자의 환희 : "몇 대나 격추시켰냐 ?" 는 지상 요원의 질문에 답하는 해군 비행사의 모습 

 

제공권을 잃게 된 일본 해군은 수상 함대의 활동도 함께 부진해지고 보급, 병력 증원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동안 점령했던 남 태평양의 군사적 거점 들을 하나, 둘 상실하게 되고 점점 일본 본토로 접근해 오는 미군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게 됩니다.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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