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미츠 제독이 미 해군의 비밀 무기라고 부른 "울리히 환초"에 정박중인 소위 "살인자" 함대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사진.

 

기동 부대는 대형 항모 2척과 그 보다 소형인 항모 2척이 기동 부대의 핵심이 되어 약 300대의 항공기를 탑재하고 있었고 그 둘레를 전함이나 순양함 같은 대형 함정이 방위진을 펴고 그 주위를 다시 30척의 구축함이 에워 싸고 있었다.

 

1. "귀하가 하는가 우리 측이 하는가 ?"

 

1945년 4월 7일

 

기쿠스이 I호 작전의 해상 작전부대 (야마토 외 9 척)는 목적지점을 향해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그들의 출항에서부터 정찰기와 잠수함을 통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함대가 분고 해협을 나서자 2 척의 미군 잠수함 USS THREADFIN (SS-410) 과 USS HACKLEBACK (SS-295)이 그들을 추적하여 즉시 그 위치를 제 58 기동부대 (TF 58)에 보고했다.

 

그 사이 미군 측에서는 야마토의 격침을 두고 견해 차이가 표면화되고 있었다.

 

제 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키나와 근해에 있던 대규모 미군 수상함대를 동원하여 야마토를 격파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 전함의 수병들은 최근 수 개월동안 해안 포격이나 항모호위 등의 임무만을 맡아왔기 때문에 함 대 함의 수상전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 58 기동함대의 지휘관 미처제독은 휘하의 함재기 조종사들이 일본 해군의 상징 야마토를 격침시킬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참모장인 앨리 버크 준장에게 명령을 내려서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정오에 일본 함대를 공격하기로 한다”는 뜻을 스프루언스에게 전하도록 했다.

 

앨리 버크는 좀 더 간단명료한 전문을 보냈다.

 

“귀하가 하는가 우리 측이 하는가 ?”

 

스프루언스는 아쉽지만 양보했다.

 

“귀관에게 맡긴다.”

 

 

 

 

"제독들의 제독"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해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후송된 Willam "bull" halsey 의 뒤를 이어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부터이다. 이전부터 각종 함정의 지휘관으로 실력을 쌓아 왔고 위의 대화에서도 드러나지만 공명심이나 언론의 관심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언제나 냉정하고 치밀한 상황 판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마법사" 미처 (MARC A. MITSCHER) 와 참모장 앨리 버크 준장

 

제 58기동부대의 사령관 마크 미처중장은 전술가로서 마법사에 비유되었다.

 

미처는 온화하면서도 용감한 지휘를 보여 주어 장교와 수병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친구 HALSEY 제독에 의하면 미처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당시의 미 해군에는 훌륭한 지휘관들이 많았고 부하들에 대한 애정어린 배려와 몸을 사리지 않는 용기는 어려운 임무를 맡고 있는 휘하 장병들에게 참으로 귀감이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 남긴 회고록이나 인터넷의 글에서도 미 퇴역 군인들은 그들의 전시 지휘관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는 극한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낸 진정한 전우애에서 우러나온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존경할 대상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2.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켜라 !

 

“조종사들은 각자의 항공기에 탑승하라!” 오키나와 근해에 있던 12 척의 미군 항모 승무원 대기실에는 마침내 이와 같은 명령이 흘러 나왔다.

 

1945년 4월 7일 10:00시

 

전투기, 뇌격기, 폭격기등 280 대의 해군기로 편성된 공격대 제 1진 (FIRST WAVE) 가 항모에서 일제히 출격하여 북방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공격대의 목표는 일본 함대를 모두 격침시키는 것이었다. 공격 목표물 중에 일본 최고의 전함 야마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행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12시32분 야마토의 레이다가 적기를 포착했다. 즉시 기동부대의 각 함으로 긴급신호를 발했다.

 

확성기가 그 사실을 알리고 나자 함내는 오히려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견시병들 (LOOKOUT) 이 미군기를 포착했다.

야마토의 항해장이 외쳤다.

 

"적기는 백 대이상 현재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 !“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사격 개시 !”

 

야마토의 대공 포화가 불을 뿜었다.


 

 

 

야마토의 탄막을 뚫고 급강하 폭격기 헬 다이버 (HELL DIVER) 2기가 교묘하게 침입해 왔다.

 

12시 41분 2기의 헬 다이버는 폭탄을 야마토의 메인 마스트 부근에 명중시켜 그 뒤 편의 레이다 실을 파괴하고 8명의 수병을 죽였다.

 

4분 후 어벤저가 발사한 어뢰 하나가 야마토의 좌현 앞부분에 명중했다.

 

이윽고 미군기는 공격을 중단하고 각기 모함으로 돌아갔다. 제 1진의 공격이 끝이 났던 것이다.

 

야마토의 장교들은 단 한 발의 어뢰정도로는 이 거대한 전함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항해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용케도 한방 먹였군”

 

그러나 제 2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이토 중장은 그렇게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습으로 희생된 수병들의 시체가 함교에서 실려나오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최악의 사태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보 론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남자.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 구사카 류노스케

 

텐이치고 작전의 제 2 기동부대 지휘관인 이토 세이이치 제독이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

 

1. 수상함대에 대한 항공지원이 전무함 (히요시에 있는 연합합대 사령부는 단 1대의 항공기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2. 수상함대의 수적 열세 (우리 측 (일본측을 말함) 은 모두 10척인데 반해 적은 최하 60 척 정도로 추정된다)

 

3. 출항 시간의 지연 (기습의 이점 상실)

 

에 대하여 제 2 기동부대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 (장성에서 위관급까지) 이 공감을 하고 불만을 표하자 급기야 히요시에 있는 연합 합대 사령부에서는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이토 세이이치의 해군병학교 동기생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를 직접 보내 이토 제독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끝까지 과연 이 작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회의하는 이토 세이이치에게 궤변을 늘어놓던 구사카 류노스케는 다음과 같은 작별의 말을 남긴다.

 

"자네는 항복을 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하려 하는 1억 일본인들을 대표하여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네"

 

그러자 철옹성같은 위계질서의 일본 해군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8척의 구축함 함장 중 1명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구사카 참모장과 수행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제국 해군의 운명이 이 결전에 달렸다면 도요타 소에무 제독 (연합함대 사령관) 이 히요시의 벙커에서 나와서 직접 지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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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연회

 

 

 

 

 

야마토의 지휘부 : 전쟁 초기와 말기의 사진.

 

야마토는 한때 연합함대 사령관의 기함으로 최고의 대우 (심지어 급식에서도 !! 다른 해군 장병들과는 달리 전쟁 말기까지 "쌀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를 받았고 이는 승무뭔 선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야마토에 탑승 하고 싶어 했고 승무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군국주의 일본군의 상징이자 일본군 장교들의 호사 취미중 하나 였던 명검 수집. 현대의 샐러리 맨들이 고급 차를 사려고 무리를 하듯이 그 시절에는 이름있는 장인들의 일본도를 사기 위해 빚을 지기도 했다는 군요)

이 사진속의 일본도를 주목해 주세요. 소위 "일본 무사도"를 상징한다는 일본도가 후에 어떻게 사용 되는지는 5 ~ 6 편에서)

 

1945년 4월 5일 17시 30분. 작전 개시 전야의 야마토 함상

 

모든 승무원에게 사케 (sake) 가 배급 되고 마지막 연회가 시작되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이었기에 그 순간이 더 소중했는지 모른다. 평소의 엄격한 규율은 느슨해졌고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웃음이 피어 올랐다.

 

승무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두고 온 고향의 노래를 불렀고 계속 술을 마셔 댔다. 엄연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그들은 더 크게 웃고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사관실 (WARDROOM) 에서는 야마토의 초급 장교들이 모여있었다.

 

건배를 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리던 도중 보조 항해사 (ASSISTANT NAVIGATOR) 스즈키 소위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일순간 사관실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누구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사관실의 모든 사람들이 스즈키 소위를 노려보고 있을 뿐.....

 

애써 감추고 했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다시 그들을 휘감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고 그것은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함장과 부장이 양손에 사케를 들고 사관실을 찾아왔다.

 

50여명에 달하는 초급장교들은 함장과 부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취중에 함장의 대머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 부장의 옷을 잡아 당겨 찢어 버리기도 했다. 평소였더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 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모든 것이 허용되는 밤이었다.

 

2. 어머니의 편지

 

통신장교 나카다니 소위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룸메이트인 요시다 소위 (레이다 장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나카다니 소위는 요시다 소위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카다니 소위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NISEI) 였다. (즉 그는 일본계 미국인인 미국 국적자이던 것이지요.)

 

게이오 대학에 유학 도중에 해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그의 두 동생들은 유럽 전선에서 미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선량한 청년으로서 오직 그만이 미군의 긴급송신문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니세이라는 이유로 그의 몇몇 상급자들은 많은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모욕하고는 했다.

 

그럴때면 그는 갑판에 홀로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정성스런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있다.

 

부디 네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오랫동안 기다려온 어머니의 편지였다.

 

그 동안 여러 동료들이 친구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누릴동안 오직 그만이 그런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출격 전야에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참고 : 이 편지는 연합국과 일본의 유일한 교섭로 였던 중립국 스위스를 거쳐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수 많은 괴롭힘에도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나카다니소위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요시다소위는 말없이 편지를 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참고 : 2차세계대전중 (일본에 의한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에서는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강제 소개명령이 내려져서 대부분 서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량한 중서부 오지에 위치한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아마 나카다니 소위의 어머니도 이런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23 : 00

 

함내의 통신시설 (PA)을 통해서 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군들 오늘 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우리의 임무로 돌아간다.

 

최선을 다해 주기바란다. 이상."

 

예전처럼 엄격한 말투였지만 왠지 부장의 음성은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애정어린 목소리 였다고 요시다 미츠루 소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제 축제는 끝이 났고 마지막 결전만이 야마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일본 해군 주요인물


연합 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

 

제 2 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 중장

 

제 2 수뢰 전대 사령관 고무라 게이조 소장

 

야마토 함장 아리가 고사쿠 대령

 

야하기 함장 하라 다메이치 대령

 

야마토 부장 노무라 지로 대령


 

 

 

P.S. 이 글에서 승무원들에 관한 내용은 실제 야마토의 승무원이자 생존자였던 요시다 미츠루 (YOSHIDA MITSURU) 의 "REQUIEM FOR BATTLESHIP YAMATO" (번역 : RICHARD H.MINEAR) NAVAL INSTITUTE PRESS를 참고했습니다.


보 론


(1)

 

1943년 전황이 악화 되자 일본은 문과 대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를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강제 징집에 나서게 되는 데요.

 

이때 평소 엘리트 주의를 표방하며 육군과 사사건건 대립해오던 해군과 육군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악명을 익히 알고 있던 많은 대학생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심지어 해군에의 입대를 "국내 망명"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일본 유수 대학의 많은 대학생들이 해군에 장교로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 (T T) 이들도 결국 지옥을 경험하게 되지요]

 

제가 참조한 위 도서의 저자 요시다 미츠루씨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었던 학도병 출신이었습니다

 

많은 사관들은 마치 악마처럼 난폭하게 행동했다. 직업 군인들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학도병의 사소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 할 때 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대 전원에게도 가혹한 체벌을 가했다.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학도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생지옥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문을 들어선 후 얼굴 모양이 바뀔 정도로 구타를 당하는 “맹훈련”의 날이 계속 되었다. 1945년 1월 2일 아침은 카네코라는 소위에게 20번이나 얼굴을 맞아 입안이 갈기갈기 찢어져 고대하고 있던 새해의 떡국을 먹지 못하고 피를 삼키며 지냈다. 2월 14일은 같은 부대의 거의 전원이 외출했을 때 농가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밤에 7시간이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몽둥이로 개, 돼지처럼 엉덩이를 맞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리고 한 사람씩 사관실에 불려 들어 갔는데 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사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타 당했다. 얼굴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다시 일어서면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맞아 나가 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마루 끝에 부딪혀 중태에 빠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이러한 야만스러운 짓을 한 사람은 분대장 츠츠이라는 중위로 우리들은 아직도 이 남자를 찾고 있다.

 

직업 군인들은 종종 말단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현재의 지위에까지 오른 자들로 학도병들은 이들 직업군인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는 자신과 비교하여 학생들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특권계급 출신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2)

 

아래의 문장은 카스가 타케오 씨의 1995년 6월 21일자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카스가 씨가 이 편지를 쓴 것은 85세 때의 일이다. 해군에 소집되어 츠치우라 해군 기지에서 학도병을 위해 식사, 세탁, 방 청소 그 밖의 시중을 맡은 그는 출격전야의 대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러기 룸에 송별의 주연석을 준비함. 내일 출격하는 젊은 사관들의 술자리는 데우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거나 벌컥벌컥 마시기 ! 결국에는 모든 것이 수라장으로 변하여 어두운 막장 아래의 전등을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양손에 치켜든 의자로 창유리를 와장창 차례로 부수며, 새하얀 테이블 보도 찟겨져 나간다. 군가는 욕하는 소리처럼 서로 뒤 섞이고 등화관제가 실시되는 군대에서 여기 기러기 룸의 술자리는 별세계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오늘밤만의 목숨. 부모, 형제, 자매의 얼굴 모습,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같이 돌고 도는 상념은 끝이 없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 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서라고, 젊은 고귀한 청춘의 목숨을 바칠 각오는 다짐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팔짱을 끼고 명상하는 사람, 엉망이 된 송별회장을 떠나는 사람, 몇 시간이나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 처참한 출격 전야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학도병사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른 아침 비행장으로 달려가 지난밤에 물이 아닌 찬술을 나누어 마신 용사는 히노마루의 머리띠를 매고 용감하게 높은 폭음을 내며 출격 ! 나는 영령이 되신 분들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훈련 뒤에 매일같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기합이 계속되었다.”

 

카스가 타케오는 매일 같이 당한 구타의 후유증으로 현재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관들은 “군인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체벌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편지는 지원자들이 죽음 전야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 오오누키 에미코 저 / 모멘토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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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는 게으르고 무능한 제독들 때문에 떠 있는 호텔이다."


                                                 - 익명의 일본해군제독


"야마토를 해체 하여 그 재료로 항공기를 더 생산하자"
 

                         -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

 

 

 

 

야마토의 모습 : 사진속의 사람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거대한 전함인지 실감하게 된다.


1. 야마토를 둘러싼 논란

 

한때 일본 해군의 자랑 이었던 야마토가 이렇게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서 화려한 함대간 격전과 그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일본 해군 고위층에서는 거함대포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진리 그 자체였다.

 

1920~30년대 각국 해군은 해군 항공 (Naval aviation)의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세는 역시 거대전함 중심주의였다. 이는 비단 일본에만 국한 된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은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미약했다.

 

대개 해군 항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영관급이나 젊은 장교들이었지만 결정권을 가진 고위 장성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더구나 여기에는 해군 항공과 수상 함대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한 몫을 했다.

 

 

 

일본 해군의 화려한 나날들 - 진주만, 인도양을 종횡무진 누볐던 아카기호의 함상 지상요원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항공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전 세계에 해군 항공의 진가를 보여준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와 "리펄스" 함을 격침시킨 것은 야마토와 같은 거대 전함이 아니라 일본 해군항공의 전투기들과 뇌격기들이었다.

 

대세는 해군 항공으로 기울고 있었고 더구나 함대가 그 능력을 발휘하기위해서도 그들을 적 항공 부대로 부터 보호해줄 항공 부대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야마토의  엄청난 연료소비량 (3,400톤) 은 미군의 잠수함대와 남서 태평양 탈환으로 보급선이 끊어진 일본 해군의 열악한 유류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야마토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주요 해전에 항상 참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토 1대의 유류소비량이면 구축함 수 척을 운용할수 있다는 것을 아는 해군 일각에서는 실랄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었다.

 

야마토는 대체로 함대의 기함 (flag ship) 으로서 항상 보호를 받거나 후미에 있으면서 귀중한 연료를 소비하는 데 상선단을 호위하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여타 전투 부대 장병들의 야마토에 대한 시선은 차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해군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전함 야마토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속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2. 드디어 출격이다 !

 

1945년  3월 29일 구레(KURE) 군항

 

야마토의 승무원들은 계속되는 맹훈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고 내습하는 미 해군 58 기동부대의 함재기들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야마토에 대한 출항 명령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힘든 훈련으로 차라리 실전이 시작되면 이런 훈련들은 받지 않아도 되니 어서 전선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병들도 많았다.

 

장교들도 언제쯤 출항하는지 그들의 상대가 누가 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라는 명령이 전해진 것이다 !

 

18.1 인치 포탄 1170발, 제 2주포탄 1620발, 대공포탄 13500발, 소형기관총탄 1,150,000을 만재한 야마토에는 긴장감과 함께 이제는 우리도 전선에 투입된다는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3. 최후의 방어선 오키나와

 

 

 

 

 

 

필사의 항전 : 기쿠스이 작전의 일환으로 감행된 가미가제 공격


- 다음은 당시 특공기 호위를 명령받은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가 남긴 메모의 내용이다.

 

"우리 중대에 주어진 임무는 최선의 것이라고는 할수 없다. 중대장 대리로서 나는 전황이 한층 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국은 절박해지고 있다. 갈아 입을 옷을 지급받는 일도 드물다. 패배했으나 정복된 것은 아니다. 제65비행중대의 조종사는 따로따로 태어났으나 한 날 한 시에 죽는다."

 

결국 이 글을 쓴 소노다 대위는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되어 사망했다.

 

그의 유해에서 피로 물든 메모와 비행도가 미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 침공부대는 우시지마 중장 (육군)의 지연 작전에 의해 오키나와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상외로 오키나와를 방어하고 있는 일본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미 침공함대는 육상부대의 호위와 보급선 유지라는 역할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이에 일본 군부는 미군 함대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군의 엄청난 규모에 대항한 수상함대의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은 가미카제 특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구상했고 운용가능한 거의 모든 항공기를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대규모 특공 공격을 노린 이 계획은 "텐이치고 작전"이라고 불리웠고 그것은 수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기쿠스이 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야마토는 텐고오 작전의 일환으로 제 5 항공함대 사령관 우가키 중장이 지휘하는 특공기가 오키나와 주변지역의 적 함정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기 위해 경 순양함 야하기호 외 8척의 구축함을 대동하여 제 58기동부대의 항모군을 오키나와 근해로부터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군 함재기와의 전투에서 이들 함정중 1척이라도 살아 남으면 오키나와까지 항해를 계속하여 그곳 해변에 스스로를 좌초시켜 해안 포대로서의 구실을 하여 미군 상륙함대를 포격하고 함포의 포탄이 바닥나면 승무원들은 미군들과 백병전을 벌이다 죽는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목표였다.

 

야마토의 이 임무자체가 사실상 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일본 해군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전함 야마토는 적 함대와 대결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 조차도 사치에 해당하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처한 냉엄한 현실이었다.

 

P.S.

 

1. 다음 편에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 해야 하는 야마토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이런 자살과도 같은 임무를 둘러싼 일본 해군 내부의 갈등 그리고 일본 해군의 상징인 전함 야마토를 공략하려는 미 해군측의 전력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조종사 기근이 가져 온 악순환

 

 

 

 

"BURNING HELL" 미드웨이 해전의 가장 큰 피해 사항 :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이 불타는 항모에서 거의 몰살을 당하면서 귀중한 인적 자원인 숙련 조종사들을 대거 잃게 되었고, 그 빈 자리를 제대로 된 비행 시간을 갖지 못한 미숙련 조종사들이 메우게 되면서 1944년 마리아나 제도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미 해군측에 일방적인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미군 비행사들이 '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 이라 부른 공중전)

 

 

 


승자의 환희 : "몇 대나 격추시켰냐 ?" 는 지상 요원의 질문에 답하는 해군 비행사의 모습 

 

제공권을 잃게 된 일본 해군은 수상 함대의 활동도 함께 부진해지고 보급, 병력 증원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동안 점령했던 남 태평양의 군사적 거점 들을 하나, 둘 상실하게 되고 점점 일본 본토로 접근해 오는 미군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게 됩니다.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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