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야마토를 아십니까?

 

2차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대, 최고 성능의 전함으로 연합국을 긴장시켰던 일본 해군의 전함 야마토는 전쟁 초기에  태평양을 제패 했던 일본연합함대의 상징이었습니다.

 

한때 자매함 (sister ship) 무사시 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거함대포주의 (巨艦大砲主義) 의 대표 주자로 큰 기대를 모았던 야마토는 전쟁 말기 너무나 허망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하고 말았습니다.

 

소위 욱일승천의 기세로 전 아시아를 지배 하고자 했던 일본의 야욕과 함께 탄생하여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종말을 예언이라도 하듯 태평양의 심연으로 침몰하고만 전함 야마토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시험 항해중의 야마토 : 이때만 해도 나날이 승승장구하는 일본해군의 상징으로 또한 거함대포주의의 선두주자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1. 저물어가는 태양

 

전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한때 태평양을 움켜 쥐었던 일본의 연합함대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한때 침체되었던 미 태평양 함대는 서서히 그 가공할 힘을 보여주고 있었고 연합 함대는 분전했지만 미드웨이의 패배를 극복하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 :  미 태평양 함대를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멸시키고자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야심찬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미 해군은 진주만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고 일본 연합함대의 행운의 별은 빛을 잃어갔다.

 

전쟁 후 1,2 년은 크게 떨치리라는 야마모토 제독의 근심어린 예측이 그대로 맞아들어 가는 듯 했다. 그러던 중 야마모토 제독 마저도 1943년 4월 18일 부갱빌 상공에서 미군기의 요격에 의해 격추 되어 사망하고 만다. 일본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자 미국으로써는 미드웨이 해전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한때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했던 그는 국력의 차이를 들며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처음에는 무모한 전쟁을 피해 보려했던 의식있는 (?!) 군인으로 군신으로 미화되기도 했으나 후세 그의 지휘를 받았던 하급 지휘관과 병사들은 그런 미화에 대해서 냉소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후 전쟁 책임을 육군 지도부에 떠넘기기 위해서 해군이 그의 실체를 윤색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때 일본군의 아성이었던 남 태평양은 이제 일본군들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의 해군 항공전력도 숙련된 조종사들의 늘어나는 전사로 인해  그 빛을 잃고 있었다. 해군 최고의 ACE로 손꼽히던 사카이 사부로도 한쪽 눈을 잃고 본국으로 귀환되고 만다. 일찍이 너무나 엄격한 기준으로 조종사들을 양성했던 일본 해군은 이제 심각한 조종사 기근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ACE 들 : 사카이 사부로 (上) 와 "라바울의 악마" 니시자와 히로요시 (下)

 

사카이 사부로는 "라바울의 악마" 니시자와 히로요시와 함께 일본 해군항공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30년대말 중국전선에서 부터 태평양전쟁 개전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기습, 남태평양 상공까지 그는 일본해군의 예리한 칼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와 그의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참한 죽음과 패배였다.

 

더구나 태평양의 공포로 불리우던 ZERO전투기도 미국의 신예 HELLCAT과 충분한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미군 조종사들을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F6F HELLCAT : F4F WILDCAT의 후계기로 태평양전쟁 당시 미해군의 주력 전투기로 활약했다. 미군특유의 두터운 장갑으로 인해 왠만한 피탄에는 문제없이 귀환이 가능했고 조종사의 생존률도 높았다. 더구나 .50 구경 기관총 6문을 장착한 HELLCAT은 일본 조종사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전후 50년이 지났지만 기관총을 발사하며 자신을 추격하는 HELLCAT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 태평양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나온 전직 일본 해군 조종사의 인터뷰 중에서)

 

계속되는 패배를 만회해 보고자 거의 모든  전력을 다 동원 하다시피하여 승부를 걸었지만 (레이테만 해전) 결과는 참담 했다.  더구나 정상적인 항공 작전이 어려워지자 이때부터 가미가제 특공대를 이용한 전술이 정식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기대를 모았던 거함 무사시와 야마토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무사시는 결국 시부얀해 해전에서 격침되고 말았다.

 

 

 

한때 일본 연합함대의 총아 였던 야마토였으나 레이테 만 전투때는 미국 항모부대를 추적하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한 끝에 결국 전선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항모 츠이가쿠의 최후 : 대다수의 승무원이 함과 운명을 같이 했다.

 


* 레이테만 해전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피해상황비교

 

- 미 해군 : 고속항공모함 1, 호위 항모 2 , 구축함 2, 호위 구축함 1 / 병력 손실 : 3000명

 

- 일본 해군 : 항모  4, 전함 3, 중 순양함 6, 경 순양함 4, 구축함 9  / 병력 손실 : 1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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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도적인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 잔인함

 

(1) 제 5 특전단 (그린 베레) 소속의 초임 장교로 작전 지역내의 작은 마을을 드나 들며 대민 지원과 함께 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베트콩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 소위가 있었습니다.


베트콩을 겁내며 미군의 접근을 꺼리고 비협조적인 다른 마을의 촌장들과 달리 이 마을의 젊은 촌장이 많은 도움을 주자 이에 고마움을 느낀 소위는 인간적인 친교와 더불어 마을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어귀에 들어선 그들의 소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임산부인 촌장의 부인이 배가 갈라진 채 로 거꾸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고 합니다.

 

(2) 미군들에 의해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못했던 평균적인 남 베트남군 장교 와는 달리 강직하고 청렴한 젊은 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들도 그가 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이 사람을 다른 부대로 전속 시킬까 고민도 했지만 그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 만큼 업무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차례에 걸친 회유와 협박이 모두 실패한 베트콩들은 500 km나 떨어진 초급 장교의 노모가 살고 계신 그 장교의 시골 고향으로 찾아가 노모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2. 약자라도 누군가에게는 폭압적인 강자가 된다


(1) 중국, 프랑스, 미국으로 이어지는 초강국과의 싸움을 수년 동안 계속해온 것에서 알수 있듯이 베트남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또 그 만큼 배타적이기도 했는데요. 베트남내 중부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고산 부족들 (몽타냐르) 을 베트남인들은 멸시하고 핍박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라는 모토로 그들 소수민족들에게 접근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미군 특수부대원들.


"그 당시의 우리들은 총을 든 문화 인류학자 같았다" 라고 회고하듯 미군들은 소수 민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약품과 식품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우호의 제스추어로 고산부족들의 민속주도 마시고 전통 의상을 입고 의형제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 등 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데요. (이런 말을 하는 다큐멘터리속의 미군도 미국 남부사람이니 뭔가 통하는게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봄.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미군들 중에는 중서부 사람들 (MID-WEST) 이나 남부 출신들 (장교들) 이 많았습니다.)


베트남인들의 냉대에 시달리다 미군들의 관심과 지원을 접하고 마음을 연 고산 부족들은 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미군이 지급한 무기로 무장하여 지역 방위대를 창설하기도 하고 추락한 미군 비행사 구출에 나서기도 하고 마침내 미군의 비밀 특수부대에 가담하기도 합니다.

 

(2) 미군을 놀라게 한 일화들 몇 개

 

고산 부족의 전통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한 미군이 자신의 소지품과 군복을 마을의 광장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기억하고 뒤늦게 달려가 보니 귀중품이 그대로 인채로 놓여 있었고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남의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부대 내, 외에서 남 베트남인들의 거짓말과 적개심에 익숙해져 있던 미군들은 고산부족의 정직함에 새삼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의 진술도 미군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겠지만 뭐, 남 베트남인들이 원래 인간성이 나빴겠습니까 워낙 전란과 외세에 시달리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지요.)


왜소한 체구 이지만 평소 전투에서 보여준 침착함과 남다른 용기로 미군 동료들의 존경을 받던 병사가 식당으로 들어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은 소수민족 병사를 망치로 머리를 난타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미군들이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이 자가 내 약혼녀에게 무례한 말을 하며 희롱했다. 나는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 고 답했다고 합니다.

 

(3) 미군의 특수부대에는 남 베트남인, 베트남내 소수 민족등 베트남 사회의 하층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다수 가담하였습니다. 따라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대한 이들의 원한은 미군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 였는데요


어느 정찰 작전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베트콩을 생포하여 철수를 서두르던 시점에 베트콩 포로와 소수민족 대원간에 말 다툼이 벌어지자 미군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포로를 끌고 간 소수민족대원들은 포로를 맨손과 총으로 때려서 죽여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특수부대에 전입해온 장교는 방금 벌어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부하인 고참 부사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고 묻자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냥 모른 척 하세요" 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고 합니다.

 

 

 

 

IN HARM'S WAY : 마치 자신의 영정사진을 남기듯 임무에 나가기 전과 후에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했다.

 

정규군과 달리 고도의 자율성이 특징인 특전 부대 : MACV-SOG에서는 심지어 계급 조차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아서 자신들이 부여받은 임무 달성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팀 리더 (1-0) 로 역할을 하기도 하는 등 (예를 들자면 경험이 많은 하사가 초임 소위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전체적인 지휘-통제를 하기도 하는 식) 정규군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파격"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뭘" 해야 할지만 알려 달라 "어떻게" 하라는 말은 하지 말고


북 베트남군은 이들의 존재를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들을 분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SOG 1개팀 10명 내외를 잡기위해 정규 북 베트남군 1개 연대를 동원하기도 (HUNTER - KILLER GROUP) 했다.


백악관과 펜타곤의 직속부대로서 국경을 넘나든 비밀 전쟁을 벌인 대가는 참혹했다.

 

이들의 활동 자체가 불법 (라오스, 캄보디아 무단월경) 이므로 전쟁 포로가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많은 대원들이 아직도 MIA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


문자 그대로 증발해 버린 사람들이 많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1982년에서야 군사 전문지에 이들에 대한 기사가 소개 되었다.

 

 

 

 

 
이런 홍안의 청년들이

 

 

 

 


1990년대 말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받게 된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

 

 

 

판문점에서 북한군 대표와 마주 앉은 노병 : 2차대전 당시 독일군, 일본군 / 한국전쟁 당시 북한, 중국군 / 베트남전쟁 당시 북 베트남군과 싸웠던 역전의 노장에게도 회담 석상의 북한군은 만만치 않은 상대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 이행 주장에 대한 반발로 목이 날아간 "깡다구 넘치는" 전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이 바로 베트남 전 당시 MACV-SOG 의 지휘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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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유럽을 둘러싼 요새를 만들었으나, 지붕 덮는 것을 잊었다."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43년


 

1.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내 눈에는 피 눈물이 흐를 수도 있다는 실제 사례 : 전쟁 말기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 한때 독일 공군의 위력으로 전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독일도 마침내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1900년경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독일 도시 드레스덴의 전경

 

 

 

 

 

 

독일의 "교토"(KYOTO) 와도 같았던 드레스덴. 교토가 천운 (전쟁 전 교토를 방문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 된 미국 장관 스팀슨의 개인적 부탁이 작용했다고 함) 으로 전쟁의 참화를 비켜갈 수 있었던 반면 드레스덴은 전쟁 말기 생지옥으로 변하게 됩니다.

 

 

 

 

 

 

2.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독일이 과거 전쟁의 상흔을 애써 외면하며 부흥에 힘쓰고 있을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제의 용사들"을 다시 끌어 모으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히틀러 휘하의 장군이었으며 "유럽에서 소련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평을 받았던 정보의 귀재 라인하르트 겔렌.

 

군 정보부, SS, SD, 게슈타포 등등 악명높은 전범들이 속속 그의 휘하로 모여 들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를 찾아온 사람중 한 명이 바로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SS 보안대 중위 출신의 하인츠 펠페 였습니다.

 

동서 냉전이 격화되던 시절이었지만 미심쩍은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공직에 대거 기용되자 사회 각계에서 비난이 거세게 일었지만 미국 CIA가 비용과 조직에 관여한 "겔렌 조직" (후에 BND가 되는) 의 수장 라인하르트 겔렌은 특유의 냉혹하지만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렇게 대응합니다.

 

"우리를 넘보고 있는 동독 정보부도 과거 전범들을 기용하고 있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영국군, 미군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서독 출신의 군과 정보 기관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전후에 영, 미군의 추적 대상이 되어 체포 되고 재판을 받을 것을 우려 종전 후 혼란을 틈타 연고가 없는 동독으로 넘어 갔고 동독 정권에서도 이들 "전문 (고문) 기술자"들의 능력이 필요 하여 그들의 죄과를 눈감아 줌으로써 참으로 기이한 적과의 동침이 이루어 집니다. 이들의 존재는 동독으로 침투한 서방 측 정보원들이 체포되어 이들에 의해 잔인한 고문을 받으면서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SS출신들은 자신의 팔에 SS 출신임을 알게 해주는 문신을 새겼는데요. 고문을 받는 도중에 이를 눈여겨 보았던 정보원들 (지독한 직업적 근성 T T)이 동, 서독 상호간의 체포된 정보원 교환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그런 비밀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런 직업적 새디스트들에게 "이념"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해주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 행정부의 다른 어느 부서보다도 우리는 적은 비율 (전범 전력자와 일반인의 비율) 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까놓고 보면 너희도 다 미심쩍은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 우리들만 비난하지 마라 확 내가 아는 사실들을 폭로해 버릴까 보다." 겔렌이 이렇게 뻣뻣한 자세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와 미 CIA, 미 행정부가 뒤를 봐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동유럽, 소련 관련 정보의 상당 부분을 겔렌 조직에 의존 하였음) 겔렌 조직의 카운터 파트인 서독 주둔 미군 G-2나 CIA의 좀 정의감이 있는 (과거 OSS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전력의) 사람들 이 전범자들과 협조를 해야한다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면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미군측 고위 장성이 목이 날아가 버리곤 했으니 아무도 그의 독주 혹은 군림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소리 없는 전쟁 : 서독에 라인하르트 겔렌이 있었다면 동독에는 "얼굴없는 사나이" 마르쿠스 볼프가 있었으니 ...........

 

(존 르 카레의 소설 속 주인공 MI6의 스파이 마스터 조지 스마일리의 숙적 "카를라" 가 바로 마르쿠스 볼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말 이 있었으나 정작 작가 존 르 카레는 이를 부인했다고 합니다)

 

DIRTY WARS : 확실히 정보전에서는 한 수 위인 공산권측은 미진한 서방의 전범 처리 (저의 지난 독일 관련 글 참조) 도 스파이 포섭의 계기로 삼는데요. 그 수단이 된 것이 소련이 점령한 동독 측에 소재한 과거 제3제국 공공기관들의 방대한 문서고 였습니다. 특히 정보 기관들의 기밀 서류들에는 소속 부대, 부대원들의 갖은 악행들이 너무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예상되는 소련의 박해를 피해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 지역 사람들의 과거를 손에 쥐고 이제는 "선량한 시민이자 믿음직스런 남편, 자상한 아버지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과거 전범들을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후 과거 제 3제국시절의 악행들이 미디어에 알려지고 지탄을 받게 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과거가 밝혀진다면 사회적, 인격적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아는 과거 전범들은 끊임없는 동독 정보부의 협박에 시달리며 결국 2중 첩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중 몇몇은 체포 되거나 자신의 과거가 가족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결국 자살하는 자들도 나오게 됩니다.

 

 

 

 

THE MAN WHO KNEW TOO MUCH : 세기의 스파이 라인하르트 겔렌.

 

동부 전선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던 독일군 정보기관의 책임자로 1944년 7월의 히틀러 암살 음모 (영화 발키리의 소재가 된) 에도 가담을 제안 받았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태도로 완곡히 거절하며 그 뒤를 이은 보복 선풍을 피해갑니다. (다만 그의 휘하 귀족 출신 부하장교들이 다수 가담 하는 것을 막지 않는 모호한 태도로 양다리를 걸침) 44년 말에 이미 패전을 예상하고 정보 장교 특유의 우직함으로 "눈치없이" 히틀러에게 동부 전선에서 서서히 후퇴하여 병력 손실을 막고 독일 국경내로 병력을 집중시켜 본토 방어에 집중하자는 건의를 하지만 이미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한 히틀러로 부터 "패배주의적 사고에 찌든 자"라는 비난과 함께 정신 병원에 감금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심복들을 동원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중요 정보들을 전부 마이크로 필름에 담은 후 바바리안 알프스 지역으로 도피 시골 마을의 호수와 야산에 이를 은닉하고 미군의 포로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서게 됩니다.    

 

겔렌의 굴욕

 

구사일생으로 독일로 몰려드는 소련군을 피해 미군 포로가 되는데 성공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그를 기다리게 되는데요

 

독일군 장교 특유의 권위 의식에다 대소 정보의 최고 권위자라는 자부심에서 어련히 미군 측이 그를 알아 보고 자신을 고위 정보 장교에게 데리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맞이한 것은 20살 남짓 한 남부 출신 미군 장교였습니다.

 

그의 계급과 병과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는 심문자에 당황한 겔렌이 급기야 스타일을 구기며 다소 절박하게

"나는 미군 측에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는 말을 하자 (^^)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를 경멸하며 내 뱉는 (무식해서 더 용감한) 미군 소위님의 말씀

 

"다른 놈들도 다들 그러더군 ! 다음 !" (T T)

 

이렇게 거의 잡범 수준의 독일군 포로들과 함께 수용되어 있던 그와 그의 부하들을 구해 준 것은 "소련군 측이 정보 장교 라인하르트 겔렌이라는 자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미군 정보기관측이 입수한 첩보였고 방대한 정보의 보고 겔렌이 소련 측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미군은 뒤 늦게 그를 수용소에서 찾아 내어 아이젠하워의 정보 참모에게 그를 데려가게 됩니다.


3. 뛰어난 재능, 방첩의 귀재 하지만.....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 처럼 겔렌 조직에서 실력을 나타내 보인 하인츠 펠페는 승승장구 겔렌 조직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진급을 거듭하여 서독 정보부의 대소련 방첩 분야의 수장이 되기에 이릅니다.

 

4. 마침내 드러난 그의 정체

 

그가 겔렌 조직에 발을 들여 놓은지 꼭 10년째 되던 1961년 그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후 1963년에 재판을 받고 14년 징역을 선고받게 되지만 1969년 소련에 대한 간첩혐의로 체포된 서독의 학생 3명과 교환되어 동독으로 인계되어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가 체포되자 그제서야 과거 그의 의심스러운 행동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되는데요

 

2차대전 말 그는 영국군에 체포되어 전쟁 포로 생활을 하던 도중 영국 정보부에 정보를 넘겨 주며 조기에 석방됩니다.

 

영국 정보부에 의하면 그는 이때부터 소련을 위해 일하는 이중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기에 더 자세한 조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영국과 미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항상 서독의 동맹국인 미국과 영국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던 그의 행태도 그제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5.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 : 그의 동기는 ......

 

자신의 고향인 아름다운 드레스덴이 전쟁 말기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폐허가 되자 이에 원한을 품은 하인츠 펠페는 자신의 복심을 숨기고 그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연합국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결국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고 서독이 추진한 동독과 소련에의 요원침투작전 및 각종 고급 정보를 과거의 적국이었던 소련에 넘겨줌으로써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설명이고

 

결국 그가 꼬리를 잡히게 된 것은 다름아닌 그의 봉급에 비해 터무니 없는 소비 행태 (소련, 동독측으로 받은 돈으로 인해 가능했던) 였고 그의 전력 (동료를 팔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여러 번 주인을 바꾸는 그의 행태) 으로 보아서 앞에서 말한 설명은  그를 너무 미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니

 

누구도 그의 진정한 동기를 알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6. 에필로그 : 악인이 더 편히 잠든다

 

그가 검거하고 나중에는 배신했던 수많은 다른 국적의 첩보원들이 참혹한 최후를 맞이 한 반면 악명높은 SS 방첩요원에서 서방 연합국의 하수인으로 민주주의 서독 정보부의 방첩 책임자에서 공산주의 동독 시민으로 변신을 거듭한 그는 2008년 5월 8일 90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는 추천작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실감나는 주인공들인

 

히틀러 유겐트 출신에다 유태인을 싫어하는 동독 정보부의 실력자 문트와 그의 부하 독일계 유태인 피들러를 보면

역시 독일 주재 MI6 요원으로 활약했던 작가 존 르 카레 (독일 어문학 전공에다 영국군 정보 장교로 독일 전쟁 포로들을 심문했던 경험이 있음) 의 경험과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바탕이 되어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전후 오스트리아 빈 (Wien)을 배경으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걸작 "제 3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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