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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3 [2차대전사] 독일 공군 제 44 전투비행단 VOL 1

 

"히틀러는 유럽을 둘러싼 요새를 만들었으나, 지붕 덮는 것을 잊었다."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43년

 


#  연합군의 주,야간 공습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독일 쾰른


한때 전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독일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1. 절  망 

 

 

 

 

#  아돌프 갈란드 중장

 

스페인 내전 (콘도르 군단소속)과 영국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 참가 했던 역전의 용사.

독일군내 최연소 장군이 될 정도로 고속승진을 했지만 전쟁의 시작과 끝을 전투 조종사로서 마쳤다.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예의범절과 따뜻한 인간미를 갖추고 사라져 버린 기사도를 피비린내 나는

 

하늘의 전장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부하들뿐만이 아니라 그의 적들로 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1944년 4월, 어두운 표정의 아돌프 갈란드는 독일 공군 수뇌부 내의 그의 상관(헤르만 괴링)앞으로 절망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우리독일 공군의 붕괴가 마침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라고 그는 쓰고 있었다.

 

갈란드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단지 항공기 보급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조종사부족 때문이었다. 사실 놀랍게도 독일은 일찍이 볼 수 없었을 만큼 대량의 비행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2월의 연합군 대 공습뒤에 긴급계획이 실행에 옮겨져 공장을 소개하거나 재건하고 또  근로자들에게 주 72시간의 근무시간을 부과한 결과 어떤 공군장교의 말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비행기의 바다 속에 빠질 듯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비행기가 있다고 한들 비행기란 이를 조종할  조종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 유럽 본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미 제 8공군 B-17 중폭격기의 위용.


아직 연합군의 유럽 본토 상륙이 시작되기 전 독일과의 전투는 지상보다는 하늘에서 벌어졌다.


압도적인 공군력을 보유한 연합국의 공세가 연일 계속되었지만  여기에 대항하는 독일 공군도 만만치는 않았다.

 

1943년 미국이 주간정밀폭격에 나선 이래로 미 제 8공군과 독일공군은 평온하게만 보이는 유럽의 하늘을 피로 물들이며 사투를 벌이게 된다.
 
갈란드의 보고서는 과거 4개월 동안의 독일공군의 손실로 주간 전투기 약 1000대의 물적 손실뿐만이 아니라 독일공군의 최우수 조종사들중에서도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을 특히 언급하고 있었다.

 

3월 2일 미군의 P-47 (Thunderbolt)에게 격추당한 정예 리히토벤 전투비행단 (Jagdgeschwader 2 - JG 2 Richthofen) 의 지휘관인 26살의  에곤 마이어 중령도 그러한 희생자중의 한 명이었다.

 

마이어는 1939년 12월이래 공중전에 참가하여 미국의 대형 4발폭격기에 대한 전설적인 정면공격작전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4년 이상에 걸친 실전 속에서 그는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 26대를 포함한 102대를 격추했다.

 

 

 

 

# 4발 대형 폭격기 킬러 : JG2의 지휘관 에곤 마이어 중령. 서부전선의 에이스 중의 한 명이다.
 

이러한 뛰어난 조종사는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갈란드는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훈련을 끝낸 조종사조차도 그 숫자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독일공군 비행학교에는 수 많은 난제가 쌓여있었다.

 

그곳에는 유능한 교관이 부족했다.

 

그 이유는 가장 뛰어난 비행사는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서 현역복무가 불가능해 질 때 까지 전선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생사고락을 함께한 자신의 동료들을 두고 후방의 안전한 비행학교로 가는것을 기피하는 일선 전투조종사들의 전우애도 우수조종사를 양성하는 데 한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반면에 연합국 공군의 경우에는 충원할 충분한 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전투기 조종사의 경우 100회출격을 한 경우에는 일선 전투임무에서 제외된 후에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자신의 학생들에게 자신이 유럽의 전장에서 100회 출격을 하며 습득한 모든 지식을 후배 조종사들에게 전수시킬 수 있었다. 1944년과 1945년의 미국 조종사들은 평균 연령이 20-21살에 불과했지만 경험이 풍부했다.)  


또 비행 학교에는 훈련병들에게 충분한 비행 훈련을 시킬 만한 연료조차도 없었다. 새 대원들은 불과 112시간의 훈련비행을 받은 뒤 실전부대로 보내졌다. 이것은 미군 훈련병들의 훈련 비행시간의 절반 이하였다.


갈란드의 보고서의 참된 의미는 분명했다. 즉 연합군이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을때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생각해 볼것) 독일 공군이 연합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국 공군 만큼이나 갈란드를 더욱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갈란드의 직속상관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었다.

 

 

 

 

 

 

 

Posted by geh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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